[정흥모 칼럼] 기록이 미래다 (3)

기록은 조선의 혈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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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일기를 썼다. 임금의 일기는 150년을 이어갔다. 그리하여 나라의 빛나는 전통이 되었다. 정조로부터 시작한 조선 임금들은 일기를 썼다. 500년 왕조를 이어간 조선의 저력은 투철했던 기록정신을 통해 면면히 드러난다. 언필칭, 기록을 빼놓고는 결코 조선을 말할 수 없다. 무려 500년을 계속한 기록들과 단일한 사안에 대해 집중적으로 남긴 기록들과 기록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투철한 기록정신으로 조선은 여전히 건재하며 꾸준히 새롭게 탄생되고 있다.  

조선 왕들의 일기를 집대성한 책이 '일성록'이다. 일성록은 정조가 세손시절부터 쓴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에서 비롯됐다. 1760년(영조 36) 시작한 정조의 일기는 조선이 멸망하는 1910년까지 이어졌다. 왕으로 즉위한 이후에는 일기에 국정의 주요 내용들이 추가되었고, 이 또한 일성록에 수록되었다.

정조는 승정원(지금의 비서실)에서 작성하는 '승정원일기'가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승정원일기'와는 다른 방식의 편찬을 지시했다. 지시에 따라 주요 현안을 강과 목으로 나누어 국정에 필요한 사항을 일목요연하게 찾을 수 있도록 했다. 국왕 주변에서 매일 매일의 일들을 요점 정리 방식으로 간추렸던 것이다.

그날의 날씨부터 시작하여 신하들이 올린 상소문, 국왕의 동정과 윤음(綸音), 암행어사의 지방 실정 보고서, 가뭄·홍수 상황과 구호 대책, 죄수에 대한 심리, 정부에서 편찬한 서적, 왕의 행차와 행차시 처리한 민원내용 등이 월과 일 별로 기록되었다. 붓으로 쓰고 나를 지칭하는 용어인 '여(予)'를 주어로 삼았다. 일인칭 한자인 '予'는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서 국왕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했던 '상(上)'과 대비된다. 여는 왕이 스스로 쓴 일기임을 입증한다.

▲ 일성록(日省錄) 표지와 본문. 국보 제153호로 1760년(영조 36)~1910년(융희 4)까지 조선의 왕들이 국정에 관한 제반 사항을 기록한 편년체 기록물이다. 정조가 왕세손 시절에 쓴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에서 출발했으며 정조가 직접 작성하다가 규장각 설치 후에는 각신(閣臣)이 담당했다.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일성록(日省錄) 표지와 본문. 국보 제153호로 1760년(영조 36)~1910년(융희 4)까지 조선의 왕들이 국정에 관한 제반 사항을 기록한 편년체 기록물이다. 정조가 왕세손 시절에 쓴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에서 출발했으며 정조가 직접 작성하다가 규장각 설치 후에는 각신(閣臣)이 담당했다.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일성록'은 국가의 주요 정책이나 전례의 고증이 필요한 경우 왕실의 열람을 허용했다고 한다. '왕실의 비사(秘史)'로 인식하여 보관에 주력한 '조선왕조실록'과는 달리 '일성록'은 국정 참고용 기록물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에서는 선비들도 일기를 썼다. 이순신의 '난중일기', 유희춘의 '미암일기', 이귀의 '묵재일기', 오희문의 '쇄미록(鎖尾錄)', 이필익의 '북찬록(北竄錄)', 유만주의 '흠영(欽英)' 등 많은 일기가 자료로 남아 전해진다.
 
'쇄미록'은 임진왜란 중 민간인 오희문이 겪은 상황을 정리한 일기다. 그는 유배 중에도 일기를 썼다. '미암일기'에는 꿈이나 질병, 지방의 풍속 등 저자의 일상사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북찬록'은 이필익이 안변에서의 유배 생활을 기록한 일기로 북방지역의 생활상이 잘 드러나 있다. '흠영'은 유만주가 21세부터 33세에 요절하기까지 13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쓴 일기다.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전쟁 중에 쓴 일기로 일반에 잘 잘 알려져 있다. 난중일기는 선비들의 일기가 얼마나 치열한 정신의 산물인지를 잘 보여준다. 선비들은 전쟁이라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돌아보고 살폈다.

조선에서는 공공기관들도 매일매일 일기를 썼다. 사관들은 왕을 따라다니며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기록했다. 실록이다. 왕들의 실록은 500년을 이어가며 썼다. 비서실에서도 일기를 썼다. 지금으로 치자면 청와대 비서실 격에 해당하는 승정원에서 적은 일기가 승정원일기다. 이것도 500년을 썼다.
    
일기를 쓰는 사람들의 정신은 투철했다. 공식적으로 일기 쓰는 일을 맡았던 사람들을 일러 조선은 사관이라 명명했다. 직급이 낮았던 시관들은 종종 왕의 미움을 사기도 했는데 심한 경우에는 귀양을 가기도 했다. 전임 사관이 귀양을 가도 다음에 오는 시관은 아랑곳 하지 않고 또 왕을 따라 붙어 썼다. 기록에 목숨을 걸었던 시관들의 나라, 조선의 대부분 기록물들은 당시에는 아무도 볼 수 없었고, 후세에 전해졌다. 그리하여 지금 대한민국의 자부심이 되었다. 유네스코도 많은 조선 기록물들의 가치를 인정했다. 왕조실록이, 승정원일기가, 일성록이, 화성성역의궤와 그밖에 많은 기록물들이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렇듯 조선의 기록은 세계의 유산으로 남아 전하고 있으나 그 정신은 부서졌다. 전임 대통령의 기록물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추잡한 논란은 그런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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