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관과 참여의 갈림길에서 우리의 선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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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2년 프랑스 대통령으로 선출된 나폴레옹 3세는 늘 혁명의 공포에 벌벌 떨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구체제를 무너뜨린 프랑스 시민들은 숱한 반동의 역풍에도 1830년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를 타도했다. 대통령에 오른 나폴레옹 3세조차 1848년 시민들이 일으킨 2월 혁명으로 집권에 성공했다.
당시 유럽에서는 “프랑스에서 가장 보편적 직업은 혁명가”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나폴레옹 3세는 어떤 반동에도 굴하지 않고 혁명을 이어가던 프랑스 시민들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이 파리 시내의 길을 크게 넓히는 일이었다.
시내에서 혁명이 벌어지면 그것을 진압하기 위해 기마대가 출동해야 한다. 하지만 경험이 풍부한 파리 시민들은 좁은 골목길마다 가구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구축해 진압군 기마대의 기동력을 크게 저하시켰다. 바리케이드가 프랑스 혁명의 상징물이 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나폴레옹 3세는 이를 막기 위해 길을 넓혔고, 대로 주변에 가로수를 심었다. 가로수는 혁명 지도자들을 원거리에서 저격하기 위한 저격수 배치용이었다.
프랑스 시민들은 대통령 나폴레옹 3세를 이토록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시민혁명의 정신은 1968년 68혁명으로 이어졌다. 자동차 바리케이드로 시작된 청년들의 68혁명은 “모든 권력을 상상력에게!”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구호를 앞세워 자유로운 영혼들의 뜨거운 혁명 정신을 재현했다.
이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것이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쳤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들은 서로를 “시또양(시민동지)”이라고 부르며 혁명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무엇이 프랑스 시민들을 그토록 끈질긴 혁명가로 만들었을까? 그들은 왜 자신의 목숨을 걸면서까지 혁명의 길을 걸었을까? 행동경제학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이타적 처벌’이라는 개념을 통해 그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 프랑스 대혁명 당시 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그린 작품(장 피에르 루이 로랑 휴엘, 1789년)
▲ 프랑스 대혁명 당시 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그린 작품(장 피에르 루이 로랑 휴엘, 1789년)

공동체를 위한 손해, 이타적 처벌
이타적 처벌은 스위스 취리히 대학교의 행동경제학자 에른스트 페르(Ernst Fehr) 교수가 고안한 게임이다. 게임 규칙은 이렇다. 실험 참가자들을 A와 B 두 그룹으로 나누고, A에게 1만 원을 준 뒤 B그룹 파트너에게 그 돈을 마음대로 나눠주라고 요구한다. 얼마를 나누는지는 전적으로 A그룹 멤버의 마음먹기에 달렸다. B그룹 멤버들은 A가 얼마를 주건 무조건 그 제안을 수락해야 한다. 설혹 A가 한 푼도 안 주더라도 B가 이에 반발할 방법은 없다.
이 게임을 하면 A그룹 멤버의 성향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타적인 사람은 절반(5000원)쯤 나눠주기도 하지만, 이기적인 사람은 1만 원을 다 갖기도 한다. 상대가 거절을 할 권한이 없기 때문에 A가 1만 원을 다 챙기는 게 가능하다. 행동경제학의 거장인 대니얼 카너먼이 이 게임을 실제로 진행해보면 A는 보통 1만 원의 4분의 1정도(평균 2500원)를 B에게 나눠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 실험에 변수가 하나 있다. A와 B 외에 관찰자인 C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C의 역할은 그냥 게임을 지켜보는 게 아니다. 만약 A멤버 중 지독히도 이기적인 사람이 있어서, 1만 원을 다 가져 간다고 생각해보자.
3자가 보기에 좀 얄밉지 않겠나? 어차피 자기도 노력하지 않고 벌어들인 공돈인데, 그걸 혼자 갖겠다고 욕심을 부리는 행위는 옆에서 보기에도 영 마뜩찮다.
이때 C는 이기적인 A를 처벌할 수 있다. 어떻게 하느냐? 자기 돈 중 얼마를 내면 그 돈의 세 배에 해당하는 돈을 A로부터 박탈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예를 들어 A 중 매우 이기적인 사람이 있어서 자기가 9000원을 갖고, 1000원만 B에게 전달한다면, 관찰자 C는 자기 돈 1000원을 진행자에게 낸다. 이러면 진행자는 1000원의 세 배인 3000원을 A로부터 빼앗는다. 만약 C가 매우 정의로운 사람이라면 3000원을 낼 수도 있다. 이러면 진행자는 이기적인 A로부터 3000원의 세 배인 9000원을 빼앗는다. A가 한 푼도 못 갖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제 3자가 게임에 개입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게임을 ‘제 3자의 처벌(Third-party punishment)’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주의할 대목이 하나 있다. 자기 호주머니에서 얼마를 꺼내건 C에게 돌아오는 이익은 한 푼도 없다는 점이다. 1000원을 내건 3000원을 내건 C의 돈은 A를 응징하는 데 사용될 뿐, C에게 어떤 보상으로도 돌아오지 않는다. 만약 여러분이 C에 속해있다면 과연 지갑을 열어 이기적인 A를 응징할 것인가?
주류 경제학은 늘 인간이 이기적 존재라고 주장해 왔다. 이 전제가 맞는다면 C가 자기 돈을 꺼낼 이유는 전혀 없다. 하지만 페르 교수의 실험 결과는 매우 뜻밖이었다.
A가 B에게 5000원 이하를 제공했을 때, 즉 A가 더 많은 돈을 가지겠다고 욕심을 부렸을 때 C 멤버 중 무려 55%가 자기 지갑에서 돈을 꺼내 A를 처벌했다. ‘내가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저런 욕심쟁이를 가만 둘 수 없어!’라고 생각한 정의의 사도가 전체의 절반을 넘었다는 이야기다.

방관과 참여의 갈림길에서
이 게임의 이름이 ‘이타적 처벌’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C는 단지 정의감만으로 기꺼이 지갑을 열고 손해를 감수한다. 프랑스 시민들이 끝없이 혁명을 반복한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들은 목숨이 위협 받는 상황에서도 기꺼이 악랄한 지배자들을 응징하는 일에 나섰다.
이타적 처벌은 방관과 참여의 갈림길에서 우리 민중들을 참여의 길로 안내하는 소중한 본성이다. 우리는 이웃에게 고통을 주는 악인을 처벌하기 위해 연대투쟁에 나선다. 그럴 때마다 주변에서는 “나서지 마. 그냥 방관하고 살아”라는 조언이 난무한다. 하지만 불의를 보고도 참는 일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비겁함을 잊지 못하고 부끄러워한다. 그 과정이 반복되다보면 우리는 마침내 그 불의를 응징하는 이타적 처벌에 나선다.
‘모른 척 지나갈까?’라는 유혹이 나를 끌어당길 때, 이타적 처벌이 역사를 발전시켰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이타심은 유난스러운 것도 아니고,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다. 그게 바로 사람이 살아가는 보편적인 길이다. 그리고 역사는 그것을, 정의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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