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을 "민중항쟁"으로 부르는 그 날이 어서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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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말에 제주 4·3 민중항쟁 70주년을 맞아 전국노동자대회를 참석했었다. 집회에서 발언하시는 분들은 제주 4·3에 올바른 이름을 부여해야 한다고 하였다. 4·3 민중항쟁을 정부보고서에는 4·3사건이라 칭하고 있는 모양이다. 집회 말미에 제주 민예총의 서예가 한 분이 이름 없는 백비(다음날 제주 4·3 평화기념관에 누운 백비를 상징화한 것이란 걸 알게 되었다)에 일필휘지로 “4·3민중항쟁”이라고 붓글씨를 쓰는 의식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4·3에 “정명(定名)”을 해야 한다며 모두가 정명운동에 참여하자고 했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튿날 4·3 평화기념관에서 해설사와 함께 역사기행을 진행하였다. 전시실 안에 천장에서 뻗어 내린 빛줄기 아래 어제 말하던 백비가 누워 있었다. 그때서야 어제 집회에서 진행됐던 정명의식이 갖는 의미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노년의 해설사께서 우리 공무원들이 이름 없이 누워있는 저 비석에 올바른 이름이 쓰여질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지고 응원해달라는 당부의 말씀을 하셨다.

1947년 3.1절 기념일에 시작된 제주도민 3만의 봉기를 시작으로 남한만의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1948년 4월 3일 남로당 무장자위대 봉기는 좌·우의 보복과 학살로 치달아 무려 6년이 넘게 지속되었다고 한다. 남한 내 단독정부를 수립하고자 한 이승만과 냉전체제 하에서 동북아에 진지를 구축하고자 한 미군정에 의해 제주도민은 사람이 아니었고 제주도는 지도에서 없어져도 되는 땅이었다.

제주도민들은 진압군의 무차별 학살에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영문도 모른 채 죽어야 했고 살아남기 위해 산으로 올라가 동굴 속에서 연명해야 하는 비참한 세월을 무려 6년이나 보내야 했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 후에도 수십 년간 “빨갱이”라는 주홍글씨가 씌워져 연좌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고 한다.

평화의 공원에는 당시 예비검속으로 끌려간 후 행방불명된 이들을 기리는 조형물이 있다. 생사의 기약 없이 끌려갔던 수 많은 양민들의 대열 중 한 명의 처연한 눈빛이 나의 발길을 붙잡았다. 슬픔과 분노의 표정이 드러나 있지 않지만 역설적으로 감정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지난 세월 권력자의 입맛에 따라 폭동이라 불리다 사회의 민주화 이후 역사적 재조명의 노력이 쌓여 이제 노동자 민중에게는 민중항쟁이라 불리고 국가기념일로 제정되는 시간까지 왔다. 7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에는 문재인대통령이 직접 추념식에 참석하여 “국가폭력에 의한 제주도민의 고통과 희생에 대해 사과하고 4.3의 완전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이루겠다”고 약속했다.

깊은 생각 없이 떠난 제주에서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며 다시는 역사의 수레바퀴가 거꾸로 돌지 않도록 무명의 백비에 제대로 된 이름을 새기는 날이 빨리 오길 기원한다. 매년 피는 제주 유채꽃의 화사함을 한 점 부끄럼 없이 즐길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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