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 이야기> 과거부정, 자기부정 반복하는 일본

우리나라 주변 4개국 분석 - 세번째 일본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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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0년, 일본이란 국호가 최초로 등장한 해이다. 그 전까지는 나라 이름조차 없었다. 그저 왜(倭)로 불리던 변방의 관심 없는 섬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왜(倭)라는 명칭은 고유명사가 아니다. 오랑캐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중국의 하남지역에도 왜(倭)라 불리던 집단이 있었으며, 발해만 연안지역에도 왜(倭)라 불리던 집단이 있었다.

왜(倭)라 일컬어지던 현재의 일본열도에 문명의 씨앗이 뿌려진 획기적인 사건은 세 차례로 크게 구분지어 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기원전에 대륙국가인 우리나라에서 신석기·청동기 문화가 전파되었음을 꼽을 수 있다. 두 번째는 369년 전후 가야지방을 통해 기마민족이 철제무기체계를 갖춰 바다 건너 정복전쟁을 펼쳤다. 세 번째는 660년 및 668년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던 시기로 대량 이주가 이뤄지면서였다.

결국, 일본이란 나라를 세운 건국자들 대부분은 대륙국가인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사람들이다. 다시 말하면, 고대한국인들이 일본 건국 아버지라는 말이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제럴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일본인의 뿌리’라는 논문에서 “유전자 및 유골 연구결과 기원전 4세기경 그 당시 고대 한국인들이 우월한 무기와 선진문물을 가지고 건너가 조몬(繩文, 신석기)인들을 변방으로 축출하고 일본의 주인이 되었다. 즉, 일본인은 한국인의 후예다.”라고 밝혔다.

또한 돗토리(鳥取)대학 이노우에 다카오 해부학교수는 “야요이(彌生, 청동기·철기)인의 미토콘드리아DNA염기배열 분석결과, 현대 한국인의 미토콘드리아DNA염기배열과 일치한다.”라고 말했다. 그밖에 여러 문헌과 유물이 이와 같은 진실을 수없이 증명하고 있다. 이러한 왜(倭) 및 일본사를 시대별로 크게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조몬(繩文, 신석기시대), 야요이(彌生, 청동기·철기시대), 고훈(古墳, 고분시대 3~7세초), 아스카(飛鳥), 나라(奈良), 헤이안(平安),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 남북조대립,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 전국시대, 오다 노부나가 및 도요토미 히데요시 전국통일, 에도막부(江戶幕府), 근대(메이지~1945년 패전), 현대(1945년 패전 이후)로 대별된다.

이러한 시대구분에 있어, 특이점은 국명을 거의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이러한 경우는 없다. 일본이란 국호 사용례를 굳이 들자면 8세기 나라시대, 12세기 헤이안 시대, 1889년 메이지정부 등 3번 사용되었고, 현재에 이를 뿐이다.

또한, 일본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특이점은 왜구(倭寇) 문제다. 해적질의 시작에 의견이 분분하나, 대개 8세기 우리나라 남북국 때부터 해안선을 중심으로 약탈과 방화를 저질렀다고 본다.

최고조는 고려시대 무인정권 및 원나라 간섭기로 우리나라 국력이 약한 시기였다.

이러한 왜구의 창궐은 마침내 임진왜란·정유재란이란 국가적 비극으로 이어졌다. 왜구의 소멸은 17세기 에도막부(江戶幕府)정권 때부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선과 화친의 길을 모색하면서 점차 진정되었다.

현재 우리가 눈여겨 볼 사항은 일본의 패륜행위다. 왜구 해적질, 양난, 식민통치 등 조상의 땅인 우리나라를 수차례 능멸했다. 현재도 달라진바 별로 없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문장(紋章)을 일본 수상의 문장 그대로 사용 것만 봐도 그렇다. 차별이 횡횡하고 식민 지배를 찬양하는 패륜행태가 계속되는 한, 영미(英美)같은 관계를 기대하기는 커녕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전쟁이 언제든 반복될 수 있어 미래가 대단히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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