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 제18기 노동자 중앙통일선봉대 체험수기]

통선대, 이름부터 박력 있는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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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선대, 한번 가볼래?”라는 제안이 처음 들어왔을 때, “통선대가 뭐지?”라는 의문이 있었지만, 선천적 예스걸인 나는 잘 알아보지 않고 “네”라는 대답부터 먼저 하게 되면서 이번 민주노총 18기 중앙통일선봉대(이하 통선대)에 후반기 일정에 급작스럽게 참가하게 됐다.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이라고는 민주노총에 올라온 포스터 하나 뿐. 온라인을 통해 ‘통선대’라는 단어를 검색해보았지만 나오는 내용이라곤 “힘들었지만 보람찼다”, “초코파이를 먹다가 식당밥이 나와 행복했다”, “밤샘공부” 등의 힘든 이야기들 뿐이었다.
출장이나 여행 등 외부에 나갈 때 마다 ‘밥’과 ‘잠자리’를 가장 중요시 여기는 나로서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아, 제발 둘 중 하나만 이라도 제대로 되었으면” 이라는 바람과 함께 후반기 전날의 긴장됨과 헛헛함을 보상받으려 삼겹살과 라면으로 배를 채웠다.

어두운 밤에도 우리는 달려간다

후반기 일정에 첫날이 밝았다. 이미 18기 통선대 온라인 모임을 통해 상반기 일정의 사진과 영상을 모두 보아온 터라 마음만은 통선대 전문가로 후반기 일정에 참가하게 됐다. 첫 일정은 용산역 ‘강제징용 노동자상 설립식’ 현장이었다.
약속된 시간보다 이르게 도착했지만 통선대 특유의 색모자와 하늘색 티, 분홍색 수건을 각 맞춰 입은 대원들을 보니 허둥지둥 마음이 급해져 재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용산역 계단 한켠에 자리를 잡았다.
영화 ‘군함도’ 덕택에 사회적으로 떠들썩한 덕분에 강제징용 노동자상에 관련한 언론의 취재열기는 뜨거웠다. 행사장에는 강제징용 피해자인 김한수 어르신이 참석해 당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살아온 세월동안 이야기 하지 못하고 마음 속에 억눌러왔던 슬픔과 울분이 담겨나와 더욱더 죄송함을 느꼈다.
그렇게 용산역에서의 첫 일정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통선대 활동이 시작됐다. 경기도 일산에 위치한 철도지축기지에서 첫날을 보냈는데, 이날엔 통선대의 두 꽃인 교육과 율동을 듣고 배웠다.
특히 율동의 경우, 본인이 워낙 몸치인지라 제대로 하는 것인지 마는 것인지 알지 못한채 부득부득 따라 추며 연습했다. 날이 더워 중간 중간 땀이 흐를 때 마다 대충 출 때도 있었는데, 만약 내가 조금이라도 미래의 일을 빨리 알았더라면 열심히 연습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그것은 후의 일이다.
즐거운 교육과 율동의 시간을 보내고 우리는 모두 다음날을 정비할 시간을 가지는 줄 알았으나, 이게 웬걸 소대별로 서울 점령 현수막 지령을 받았다. 통선대가 있는 지역은 3호선 지축역, 우리는 다행히도 같은 3호선 라인인 경복궁역 점령 지령을 받았지만, 운이 없던 소대들은 이대역, 동묘앞역 등 먼 곳을 지정받아 새벽에 택시를 타고 어두운 길을 걸어 왔다.

치열했지만 기억에서 사라졌던 그곳 평택

일정 두 번째 날, 우린 평택으로 갔다. 주한미군기지 철수와 관련된 투쟁으로 주한미군 기지를 행진한 후 주한미군기지 정문에서 약식집회를 가지는 것이 이날의 주된 일정이었다. 과거 평택 대추리 투쟁 때만해도 논과 밭 그리고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나는 동네였는데, 지금은 거대한 철조망이 쳐져 오로지 미군만을 위한 기지인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오랜 시간 머릿속에서 잊혀졌다는 생각에 마음 끝에서 말 못할 미안함과 탄식이 섞여 나왔다. 하지만, 더 마음이 철렁했던 것은 미군기지 정문으로 향할 때다. 정문과 멀지 않은 곳에서 성조기를 흔들고 맞불집회를 하며 통선대의 길목을 막은 보수단체들. 2시간여 진행된 싸움의 끝에는 서로에게 상처만 남아있었다. 과거 평택 미군기지 투쟁에 열렬히는 아니지만 함께 했던 사람으로써 서로에게 악을 내뱉는 모습을 보며 평화로운 우리가 미국으로 인해 쪼개진 것같아 안타까웠다.

그렇게 다시 통선대, 통일전사로
통선대에서는 정말 다양한 일이 많았다. 앞서 말했던 두 투쟁이 여러 투쟁중에 가장 많이 기억에 남는다. 사실은 8.15 전날 통선대와 대학생 통선대가 함께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에 올라가 사드반대 현수막을 높이 들고 투쟁을 진행했다. 순조롭게 끝날 줄 알았던 투쟁이 안타깝게도 한명의 연행자가 생겨 우리의 발길은 숙소가 아닌 종로 경찰서로 향했다.
언제 나올지 모르는 상황. 기약없던 상황에 우리는 통선대라는 이름아래서 다같이 입을모아 노래 부르고 구호와 함성을 외쳤다. 그렇게 2시간여가 지났을까 연행자가 석방되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의 가슴속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사실 그동안 많은 이들이 집회에 참여 후 구속이 됐을 때 바로 나오지 못하고 시간이 많이 지난 후 나온 것을 봤기 때문에, 이번에도 아침까지 구호를 외쳐야겠구나 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게 웬걸 우리의 힘으로 연행자가 석방됐고 우리는 숙소로 돌아갈 수있게 됐다는 것이 사실화 되자 뜨겁게 감정이 흘렀다. 당시 함께 했던 통선대 대원들은 그때 상황을 말로 표현할 수없지만 서로 같은 감정을 공유했다고 생각한다.

통선대, 잘 몰랐던 상황에서 가게되었고 힘들다는 이야기들로 두려움도 많았지만, 여러 가지 투쟁과 상황을 겪으면서 한층 더 사회적인 인물로 성장하게 된 계기가 된 것 같다. 과거에 “될까? 설마?”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있었다면 지금은 통선대 대원으로써 “되게할거야!”라는 의지가 더욱 생긴 것 같다.
4중대 대원 모두 내년에 또 만나자고 약속했다. 전일정은 아니더라도 마음이 닿는다면 다시한번 더 참여해 18기의 뜨거운 통일전사였던 나를 다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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