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그 해 봄날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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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저는 광주 조선대학교부속고등학교 1학년3반 25번이었습니다. 태어난 곳은 함평이고 거기서 중학교까지 다니고 광주로 고등학교를 진학하기 위해 연합고사를 보고 조대부고에 배정 받았습니다. 그 당시 우리 가족들은 서울로 이사를 가고 혼자 조선대학교 앞 동네 서석동에 혼자 자취를 하고 있었습니다. 연탄불로 밥해 먹고 지산동 동네시장에서 200원어치 반찬을 사먹던 기억이 납니다. 3월에 시작된 고등학교 1학년 생활은 얼떨떨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집에서 엄마가 해주시는 따뜻한 밥을 먹고 동네 깨복쟁이 친구들과 놀다가 느닷없이 집은 서울로 이사 가고 혼자 광주에 남게 되면서 딱히 아는 친구도 없었습니다. 나름의 돌파구로 학교 도서관에서 삼국지나 서유기를 읽고 저녁때 집에 들어오곤 했습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났습니다. 제가 다니던 학교는 조선대학교 안쪽에 있어서 정문에서부터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조선대학교 내부 등굣길에 군인들이 상주하고 있었습니다. 조선대학교 운동장이 넓은 관계로 군인 수백 명이 막사를 치고 거기서 숙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틀 정도 지났을 겁니다.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학교에 가는데 아침부터 들리는 이야기들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버스 타고 다니는 친구들은 군인들이 광주 시내에서 사람들을 무지막지하게 때린다. 사람들을 군용 트럭에 싣고 어디론가 간다 등등의 믿기지 않는 말들을 쏟아냈습니다. 교내방송이 울렸습니다. “담임 선생님들은 학생들이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고 맡은 구역대로 학생들을 인솔하고 귀가시키십시오. 학생들은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등교하지 마십시오. 다시 한번 알립니다......” 그날 저는 항상 하던 대로 걸어서 귀가를 했습니다.

저녁이 되자 여기저기 건물에 불이 나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2층 장독대에 올라가서 보았습니다. 주로 KBS, MBC 방송국 등 광주에서 큰 건물들이 불나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 날부터 상점이 문을 닫고 버스와 택시, 기차가 다니지 않았고, 전기도 안 들어오고 수돗물도 안 나오고 라디오, TV도 안 나오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광주시민 여러분, 진정하십시오.” 이런 멘트의 방송만 거리에서 울려퍼지고 있었습니다. 밤에는 창밖에서 따발총소리가 큰 소리를 내며 집지붕 위를 떠다녔습니다.

주인집 아들이 제 방으로 왔습니다. “형, 오늘밤 여기서 자면 안 돼?” 저녁에는 총알이 여기저기 막 날아다니는 상황이라 너무 무서웠습니다. 혹시나 창문으로 총알이 날아올까 창문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습니다.

당시 통금은 저녁 6시였습니다. 통금시간이 지나면 골목에서 쫓고 쫓기는 소리, 둔탁한 무엇인가로 때리는 소리, 남자의 비명소리가 자주 들렸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시민군이 도망가다가 군인에게 잡혀 우리 집 앞에서 맞는 소리였습니다.

서석동은 조선대학교, 전남대 의대, 전남도청의 삼각형 한 가운데입니다. 군인들은 전남대 의대에서 도청 쪽으로 연일 따발총을 쏴 댔습니다. 전남대 의대는 자취방에서 50미터 거리에 위치한 흰색건물이었습니다. 모든 상점이 문을 닫은 관계로 자취식량이 떨어져버려 주인아줌마의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주인아줌마가 ‘군인들이 서석동을 다 조사해서 남자들은 모조리 다 잡아간다’고 했습니다. 겁이 나서 옆 동네 사는 친구 집을 찾아 나섰습니다. 주소도 모르고 위치도 몰라서 결국은 헤매다가 통금시간 때문에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먼 거리를 걸어오다 보니 6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조선대학교 정문 앞을 지나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식은땀이 나고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조선대학교 앞에서 집까지의 거리 50미터. 대학교 정문에는 이미 군인들이 총을 들고 서있었습니다. ‘혹시 총을 나에게 쏴버리면 어떡하나’, ‘군인들이 날 부르면 어떡하나’ 이런저런 무서운 생각에 등에 식은땀이 줄줄 났습니다. 군인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먼 길을 돌아오면서 골목길 꺾이는 곳마다 군인들이 있을까봐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도청 쪽을 향해 검정색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이 운전하는 버스를 시민들의 행렬이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저도 그 대열의 뒤쪽에 합류했습니다. 한참 후 “빠빠빵” 총소리가 도청 쪽에서 울립니다. 버스를 운전하던 고등학생은 총을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시민들은 죽을 힘을 다해 뒤돌아 뛰었습니다.

며칠이 지나니까 광주사람들에게 도청 앞, 상무관, 전남대 의대 영안실에서 시체를 확인하고 가족이면 찾아가라고 합니다. 거리는 매캐한 최루탄냄새가 진동했고 집 근처 전남대 의대 영안실에는 수많은 죽음들이 있습니다. 옆구리 부분에 피 묻은 흰 천이 덮인 시체, 퉁퉁 부은 시체, 눈 뜬 시체, 얼굴 형체가 없는 시체 등등 말로 표현 못 할 정도로 끔찍한 광경이었습니다.

배가 고파서 버스를 탔습니다. 버스를 타면 광주시민들이 김밥이나 음료수를 차에 올려주곤 했습니다. 불에 그을리고 유리창은 다 깨져버린 버스를 타고 시내를 도는데 누군가 김밥과 음료수를 버스에 올려줍니다. 내려다 보니 담임 곽선생님이었습니다. “너 뭐하냐?” 담임 선생님의 목소리가 아득히 들렸습니다.

버스가 갑자기 화순탄광으로 간다고 합니다. 누군가에게 물어보니 TNT폭탄을 가지러 간다고 합니다. 버스 안에 있는 사람들이 가만가만 작은 목소리로 ‘산에 있는 공수부대가 사람들만 보면 다 총으로 쏴죽인다’고 합니다. 설상가상으로 버스 뒷바퀴에서 연기가 나고 운전미숙으로 휘청거리며 겨우 도착한 화순탄광. 시민군이 군인들에게 맞설 무기가 부족하다는 근거로 탄광 쪽에 TNT를 요구했으나 방독면 수십 개만 받고 광주 시내로 돌아왔습니다.

우리 학교 학생은 그때 당시 두 명이나 죽었습니다. 한 달 동안의 휴교가 끝나고 수업시간 보충 때문에 그 해 여름방학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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