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규찬 칼럼]

노르웨이의 숲에 국가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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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잠시 여행 다녀왔습니다. 해외로 갔습니다. 대한민국이 지겨워진 까닭이었습니다. 각하께서는 이 나라의 한참 높은 위상에도 불구하고 자기 폄훼하는 집단이 있다고 야단치십니다. 그렇지만 멀쩡한 제가 보기에도 이 나라는 헬인 게 맞는데 어떡하겠습니까? 지구 온난화로 인한 뜨거운 폭염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권력, 폭력의 무리한 양상들이 우리를 열 받게 합니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독선의 국가가 우리는 이제 꼴도 보기 싫습니다. 의리라고는, 정의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냉정한 자본의 지배가 나를 화나게 합니다. 성적으로도 탐욕스러운 회장님, 타락하고 부정한 재벌이 우리를 미치게 합니다.

맘에 들지 않는 게 도처에 깔렸습니다. 재벌들의 탐욕스러운 난개발, 게걸스러운 젠트리피케이션은 일례에 불과합니다. 정권은 엉뚱하게 성주 땅에 사드라는 외부세력을 들이겠다고 합니다.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중북, 외부세력, 비국민, 빨갱이로 몰아붙이려는 세력들이 또다시 창궐합니다. 이제 그 사드는 또 어디로 가나요? 그 와중에 세월호는 까맣게 잊혀지고, 정권실세의 충격적인 보도지침사건 또한 은근슬쩍 묻혀버립니다. 실로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연일 터져 나오는데도, 멍텅구리 같은 공영방송은 입을 딱 다뭅니다. 신문과 종편 매체들은 온갖 거짓 선전을 늘여놓습니다. 살 수 없는 지옥이 행복한 천국처럼 꾸며집니다.

힘없는 자, 약자는 결코 안전, 안녕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은 무슨 일이 닥칠지 절대로 방심할 수 없는, 진짜로 코 베가는 대한민국입니다. 많은 이가 삶을 염려하며 하루하루를 아슬아슬하게 버팁니다. 나날을 겨우 연명해 갑니다. 그런 불안한 현실을 외면한 채, 공화국의 소수 수장들은 모여 저들끼리 샥스핀을 뜯습니다. 듣도 보도 못해 이름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 버섯요리를 맛보았답니다. 아, 가난한 자들의 밥상을 뒤엎게 만드는 가진 자들의 횡포입니다. 밥 맛 뚝 떨어지게 하는 계급국가의 향연입니다. 이런 민심 배반의 국가를 이 뜨거운 폭염 속에 태연한 시선으로 어찌 지켜볼 수 있겠습니까?

선거로 표출된 민심을 와작 무시한 채, 언론통제에 나섰던 자가 여당의 새 대표로 화려히 등장합니다. 충격적인 내용들이 속속 까발려져도, 정권의 핵심 실세는 청와대 안에 뻔뻔히 버티고 남습니다. 도무지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과연 이런 엉망의 정국 속에, 한반도 주변 외교는 제대로 되고 있을까요? 보수지들조차 나라꼴이 엉망진창이라고 한탄의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런 비정상성을 덮으려는 환상과 환영이 더욱 주변에 자욱합니다. 우울과 분노, 환멸과 절망을 가리는 신화와 선전이 가득합니다. 아, 이런 뿌연 안개 속 대한민국 땅에서 뭐가 제대로 보이겠습니까? 뭘 편안히 보고 태연하게 즐길 수 있겠습니까.

▲ 성주군청 앞에서 열린 사드배치 철회 집회. 사진 = 성주사드배치저지투쟁위원회
▲ 성주군청 앞에서 열린 사드배치 철회 집회. 사진 = 성주사드배치저지투쟁위원회

이런 답답한 나라 제발 좀 떠나야 하겠습니다. 물론 이 땅에도 좋은 데 많고, 아끼고 귀하게 여길 곳 천지입니다. 누가 구태여 가르쳐 들려하지 않아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일입니다. 돈 아끼고 외화소비도 줄여야 하겠지요. 그렇지만 가끔은 다른 세계로 나가 봐야 하겠습니다. 바깥으로 나가, 주변을 휘 돌아보면서, 뻥 켜켜이 쌓였던 갑갑증을 풀고 와야겠습니다. 우울증을 날리고, 화증도 태워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하지 않고 어찌 이 열탕 안에 계속 버틸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도 다들 그런 생각으로 떠나지 않으셨나요? 여름 방학, 휴가 그래서 좋은 데 다녀오시지 못했습니까?

특별한 일도 있고 해서, 저는 제 파트너와 함께 북유럽과 발트3국을 말 그대로 무리해서 다녀왔습니다. 좋은 여행이었습니다. 에스토니아 파르누 골목의 어느 바에서는 밤늦도록 그곳 사람들과 함께 맥주파티를 벌이며 춤도 추고, 대화를 나눕니다. 인정이라는 걸 모처럼 타지에서 타자들로부터 느낍니다. 라트비아 한 게스트하우스의 늙은 주인장은 뜨거운 물이 안 나와 죄송하다며 좋은 다락방을 그냥 공짜로 쓰라며 선심을 베풉니다. 리투아니아 마치 땅 끝 같은 곳에 만들어진 십자가의 언덕은 우리로 하여금 여행이 아닌 삶의 여정을 차분히 돌아보게 했습니다. 아담한 전경이 생생한 이미지로 떠오릅니다.

스웨덴, 핀란드 이야기도 어찌 빠트리겠습니까? 아침 일찍 깨어나 산책하던 중 그곳 젊은이들처럼 발가벗고 목욕을 즐기며 폴란드에서 온 노인과 대화를 나누던 스톡홀름의 호숫가가 기억에 진하게 남습니다. 핀란드에서 우리는 푸른 숲 속 파란 호수에서 다이빙하고 한적한 민박집에서 사우나도 경험합니다. 그래도 역시 북유럽 백인사회의 인종주의를 비판하면서 우리에게 따뜻한 더운밥을 지어준 터키 출신 형제들이 우리에게 가장 짙은 핀란드의 인상을 남깁니다. 아, 전쟁에서 쫓겨나 북유럽으로 옮겨왔지만 그 곳에서도 채 정착 못하고 부유하는 집시의 비극적 운명은 또 어떻게 기억에서 빠트리겠습니까?

신자유주의의 독재를, 복지사회의 해체도, 이주와 이산의 상황과 함께 인종차별의 폭력까지도 북유럽의 이 낯선 여행자들은 예민하게 느끼고 볼 수 있었습니다. 문제없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신자유주의는 그래서 글로벌 제국의 체제였고, 그로부터 절단된 유토피아는 실제의 지구 속에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여행자는 여행 중에 해방의 기쁨과 독립의 즐거움을 가끔씩, 이곳저곳에서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자본의 논리에 잡아잡아 먹히지 않은 문화의 공간을 즐기고, 국가의 지배에 구속되어버리지 않은 자율의 시간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노르웨이입니다. 석유가스로 갑자기 스웨덴과 핀란드조차 질시하는 복지사회가 되었다지만, 여기에도 골칫거리가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여행자가 어찌 내부의 모순, 갈등을 제대로 다 읽어낼 수 있겠습니까? 허지만, 최소한 이것만은 자신 있게 보고드립니다. 노르웨이 그 높은 지령과 깊은 계곡, 수많은 폭포와 언덕 그리고 그 자연 주변 문화의 거리에서 저는 국가의 표식을 거의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경찰복장으로, CCTV로, 이러자 저러자는 스펙터클한 선전 영상으로, 이러고 저래야 한다는 지시포고문으로, 광고문으로, 플래카드로 들이닥치는 국가의 초상 말입니다.

네, 너무 탐나서 다시 돌아가 보고 싶고 영원히 살고 싶은 마음조차 생기는 노르웨이의 숲에 국가는 없었습니다. 그 국가부재의 청소함이 청정자연의 노르웨이를 더욱 멋지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헬 코리아로부터의 절은 여행자들에게 잠시 행복감을 갖게 한 것도 멋진 자연의 위력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있어야 할 곳에, 결코 티 나지 않은 모습으로, 건강한 역할과 정상적인 기능으로 존재하려는 지원부국의 배려에 심신이 편해집니다. 아무 데서나 폭력적으로 얼굴 들이대고 무례하게 다그치지 그런 독선의 무능한 국가가 아닙니다. 그런 나라, 이 땅에서는 언제나 가능할까요? 도저히 불가능한, 노르웨이의 특권인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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