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35년 공직생활 마감 앞둔 공무원노조 김원경 전 종로지부장

“지금 이 순간이 여러분이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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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일관. 공무원노조 서울본부 김원경 전 종로지부장을 볼 때 떠오르는 말이다. 광화문 세월호 추모 문화제나 투쟁 사업장 연대 집회에 거의 빠짐없이 참석하는 그에게 누군가는 ‘연대의 왕’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민주노총이 주관하는 대규모 집회나 ‘오래고 질긴’ 싸움을 힘들게 벌이고 있는 해고 노동자들의 작은 집회에도 그는 함께 한다.
한결같음, 늘 변함없이 자신의 자리를 지킬 것 같은 사람. 20일 오후, 서울 종로지부 사무실에서 이루어진 김원경 전 지부장과의 인터뷰는 평소 김 전 지부장에게서 받은 그런 인상을 다시 확인하는 자리였다.

“한 석 달 전부터인가 사람들을 만나면 종종 ‘퇴임 후에 뭐 할 거냐?’ 라는 질문을 많이 받고 있어요. ‘계속 나올 거지?’하고 물어봤으면 좋겠는데,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게 굉장히 서운해요”

김 전 지부장은 6월 30일, 35년 동안의 공직 생활 은퇴를 앞두고 있다. 퇴임을 앞둔 그에게 지인들이 ‘은퇴 후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디 여행이라도 갈 계획을 세워뒀는지’를 묻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그는 오히려 ‘퇴임 전후’를 구분하는 통념에 의문을 제기했다.

“퇴임 후에 내 인생이 바뀐다, 뭔가를 따로 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지금 하고 있는 활동들을 계속 해야 되겠다, 하고 싶다, 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생각을 해요. 여전히 해결이 안 된 일들도 많고…. 꾸준히 예전에 해 왔던 활동들을 계속하는 게 맞지 않은가 싶어요”

지난 3월 조합으로부터 ‘모범조합원상’을 수상한 김 전 지부장은 인터뷰 동안 지금까지 노조 간부로서의 활동이나 본인의 적극적인 연대 활동에 대해 크게 내세우거나 그럴 듯한 말로 포장하지 않았다. 본인의 활동을 부풀리거나 자신만의 특별한 경험을 했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어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가난 때문에 택한 공무원 생활로 ‘사회 의식’에 눈을 뜨다

어린 시절, 공무원을 하는 친척들의 삶이 "갑갑해 보여서", “공무원만큼은 되고 싶지 않았다”는 그는 결국 “우리처럼 오갈 데 없이, 생활이 어려운 사람은 공무원밖에 할 게 없다”고 생각해 1980년 3월, 처음 ‘교정직’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어려운 생계 때문에 시작한 ‘교정직 공무원’ 생활은 뜻밖에도 그에게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 지난 20일, 35년간의 공직 생활 은퇴를 앞둔 공무원노조 김원경 전 종로지부장을 지부사무실에서 만났다.
▲ 지난 20일, 35년간의 공직 생활 은퇴를 앞둔 공무원노조 김원경 전 종로지부장을 지부사무실에서 만났다.

그가 처음 근무했던 ‘서울구치소’는 80년대 역사적·정치적 격변기 속에서 학생운동을 했던 대학생들이 대거 수감됐던 곳이다. 당시 학생운동의 ‘스타’였던 김민석, 함운경, 허인회 등도 서울구치소를 거쳐갔다. 김 전 지부장은 그런 운동권 대학생들과 대화하면서 ‘민중’에 대한 개념과 ‘인권’에 관한 개념에 눈을 뜨게 됐다. 또 그 무렵, 방통대 행정학과에 재학하면서 수강했던 ‘국사’ 수업 역시 그에게 특별한 반향을 일으켰다.

“국사 선생님께서 ‘이순신 장군이 훌륭한 것이 아니라 그 밑에서 일했던 강강술래 불렀던 부녀자들, 거북선을 지을 때 못이라도 하나 박았던 목수들, 그런 사람들이 더 훌륭하다. 영웅 한 사람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이 더 강조되는 역사책을 가져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식민사관’의 문제점도 지적하시구요. 당시에 그 얘기가 저에게 굉장히 인상적으로 다가왔어요”

그렇게 ‘뜻 있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하면서 김 전 지부장은 ‘내 생각을 이렇게 가지고 가선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교정직 공무원 생활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또 24시간 교대 근무라는 작업 환경으로 건강이 나빠진 그는 결국 6년간의 교정직 공무원 생활을 접고 행정직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때가 마침 86년 호헌철폐 시위가 한창이었고 87년 대선을 앞둔 시기라 그는 시험 준비에만 온전히 매달릴 수 없었다.

“그때 대학로에서 최루탄 마시면서 백기완 선생님 집회를 많이 쫓아다녔어요. 대학로부터 시청 앞까지 행진에도 참여하구요. 당시는 광화문 광장이 없었기 때문에 서울역사박물관 앞이 거의 집회 장소였죠.”

김 지부장은 그렇게 ‘데모’와 ‘공부’를 병행하다 88년 서울시 공채에 합격해 다시 행정직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이런 행보를 볼 때 그가 공무원 직장협의회와 노동조합이 생겼을 때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자연스럽다.

“직협이 1999년도에 생겼는데 그 전까지 10년 동안은 정말 하위직 공무원으로서 열심히 일했어요. 2년마다 한번씩은 구청장이나 시장 표창을 받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공무원으로서 열심히 일했던 것이, 뒤돌아보면 주민을 괴롭혔던 일들이 많았구나 하고 느껴요. 당시 노태우 정권이 추진했던 ‘범죄와의 전쟁’은 주민들을 통제해야 하는 일이었고….”

2004년 총파업, 가장 가슴 떨렸던 순간

김 전 지부장의 35년 공직 생활 중 16년은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의 역사와 겹쳐진다. 김 전 지부장은 종로구지부와 공무원노조의 역사, 총파업과 조직이 갈라졌던 시기, 해직과 복직 과정을 더듬어갔다. 수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통틀어 그에게 가장 의미 깊었던 순간, 잊혀지지 않은 순간이 있다.

“세상의 변혁을 꿈꿨던 그 때, 그 순간을 여전히 잊을 수 없어요”

김 전 지부장은 2004년 공무원노조가 총파업을 결의하고 단행했을 때를 이야기하면서 목소리가 떨리고 눈빛이 달라졌다.

“사실상 해방 이후 공무원이 파업을 한 것은 정말 큰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죠. 10월 총파업을 결의하고, 실제는 11월에 단행했지만, 6월 말경 계룡산 근방에서 간부 결의대회를 했어요. 엄청 더운 날씨였는데 분임 토론에서 공무원노동자의 파업이 갖는 의미를 얘기하면서 자신감 얻고…, 그때의 대단했던 열기가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결기랄까 결의랄까, 그런 것들이 잘 안 보이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2004년 총파업으로 인해 당시 종로구지부장이었던 그는 해직을 당했다 2007년 복직한다.

“해고됐을 때, ‘조합원이 단 한 명만 남아 있어도 나는 지부장이다’라는 각오로 버텼죠. 또 제 주변 임원들도 다 그런 결기를 가진 분들이라 함께 힘을 모아줘 타협하지 않고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 김원경 전 지부장은 퇴임 후에도 지금까지 해 왔던 활동을 중단없이 계속해 나가겠다고 했다.
▲ 김원경 전 지부장은 퇴임 후에도 지금까지 해 왔던 활동을 중단없이 계속해 나가겠다고 했다.

모든 활동이 ‘과정’ 속에 있다고 보면 결과에 조급해하지 않게 됩니다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개인 시간을 누리고 싶기도 할 텐데 김 전 지부장이 매번 빠지지 않고 집회에 참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집에서 제 활동을 지지해 주고요(5.1 노동절 집회 때 김 전 지부장은 아내와 함께 참석했다). 집사람이 주말에도 일을 해야 하니까 집에서 혼자 뒹굴뒹굴 하는 것보다 ‘나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많다’라는 걸 보여주는 곳에 가는 게 보람 있다고 생각해서죠”

이번에도 김 전 지부장은 자신의 열성적 연대 활동에 대해 뭔가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그의 ‘한결 같은’ 행보의 원천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저는 노동조합이란 것이 목표를 정하고 활동하긴 하지만 늘 진행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속에서 뭘 ‘달성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과정’에 있다고 보는 거죠.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는 조급함은 오히려 굴욕적이고 정당하지 못한 활동을 낳게 한다고 봐요. 최근에 보면 광화문 집회나 연대집회나 하다못해 토론회에서도 마치 관광 오듯 사진 한 장 찍고 가버리는 걸 비일비재하게 봅니다. 이유야 있겠지만 그런 ‘보여주기식 활동’을 경계해야 노조가 건강하게 움직일 수 있다고 봐요. 공무원노조만 봐도 지난 지도부 때문에 실망했지만 그것은 하나의 과정일 뿐이었죠. 그것을 토론을 통해 다시 건강하게 끌어가는 지도부와 활동가들이 나타났고요. 여전히 그런 분들 어딘가에서 꿈틀대고 있고…”

퇴임을 앞두고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얘기가 없는지 물었다. 선배로서 공직생활과 노조 활동에 대해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고 싶을 만한데 그는 여기서도 남다른 말을 꺼냈다.

“남기고 싶은 얘기가 없어요. 제가 제일 싫었던 게 선배들이 와서 ‘내가 과거에 이랬다, 저랬다’라고 하는 말이었어요. 며칠 전 지부 임원 모임에서 마지막 건배사를 하라고 하길래 ‘지금 이 순간이 여러분이 할 일입니다, 투쟁’이라고만 했습니다. 그 말은 순간에 최선을 다하라는 것보다는 본인이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면 된다는 의미였어요”

이른바 ‘꼰대’ 역할을 하고 싶지 않다는 그는 그래도 후배들이 ‘현장 중심 활동’을 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싸우는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말 한 마디, 그 말이 투박하고, 그 말이 앞뒤가 안 맞아도 그런 말들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노조 활동에서도 뭔가 조급해질 때 조합원을 자꾸 만나야 해요. 저도 힘들어질 때마다 순회를 돌고 조합원들을 대하면서 힘을 얻었습니다”

서울시 공무원 합격 후, 면접관의 “왜 서울시 공무원을 하려고 하냐?”는 질문에 “서울시가 각박한 거 같아 고향처럼 만들고 싶은 꿈이 있다”고 대답했다는 김원경 전 지부장. ‘골목’이 있고 아이들이 그곳에서 술래잡기도 하며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지역 공동체’를 꿈꾸는 그에게 ‘퇴임’은 ‘없다’. 6월 30일, 공무원 직을 벗는 것도 그가 걸어온 오랜 삶의 길에서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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