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흥모 칼럼]기록이 우리의 미래다 (1)

기록의 가치는 당대에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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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섬마을 외나로도는 고흥반도 남쪽 끄트머리에 자리 잡고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아름다운 섬을 아는 이 드물었으나 우주선 나로호가 발사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해 지금은 제법 유명한 마을이 되었다. 우주선이 발사된 마을은 이 외나로도에서도 남쪽 끝에 위치한 바닷가의 작은 마을 예내리이다. 예내리도 한 때는 어획량이 풍부해 70여호가 넘는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그저 20여호만이 남아 옹기종기 지붕 낮춘 채 살아간다. 바로 이 예내리에 박종태 할아버지가 사신다. 올해로 86세를 나신 할아버지는 16살 청춘에 그보다 한 살이 많은 이웃집 처자를 만나 70년을 해로하고 계신다.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그의 나이 5살에 바다에 나가셔서 돌아오지 못하셨다. 조부모의 슬하에서 성장하면서 아버지의 자취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크면 클수록 외로움의 무게도 덩달아 키를 키워갔다. 슬하에 10남매를 나아 그중 유난히 병약했던 하나를 실패하고 9남매를 남부럽지 않게 키워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 서당에서 천자문과 소학을 익혔고, 왜정 때는 국민학교를 다니며 일본어로 공부했다. 여수에나 나가야 있는 중학교에 다닐 기회를 얻었으나 고향 떠나기를 반대했던 조부모의 만류로 더 이상 학업을 잇지는 못했다. 필체가 반듯하고 좋았던 연유로 몇 년 동안 면서기로 근무했고, 2대독자여서 군대를 면제받았다. 그 후로 동네 이장을 맡아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오랫동안 헌신했다. 할아버지에게는 유독 모난 벽이 하나 있었는데 그게 바로 기록하는 습관이다. 평생 써서 보관하신 일기책이 50여권을 넘는다. 1년에 한 권씩 잡으면 족히 50년을 넘게 써온 셈이다. 일기장에는 자식들이 성장해 온 과정은 물론이요 마을 풍습과 온갖 농사정보들이 가득하다. 세상에 태어나던 해인 1928년부터 기록되어 있는 비망록은 한 줄에 다섯 칸씩 나누어 작성돼 있다. 첫 칸은 개인사, 다음은 가족사, 문중사, 국사, 세계사 순으로 칸칸이 빼곡하다. 고흥군의회 역대 의원명단과 5선 이상의 국회의원 명단, 역대 월드컵 개최지, 평생 주고받았던 부조금의 명단과 액수를 적은 노트들도 별도로 작성해 보관하고 있다. 지난 해에는 얼마나 더 사실지 모르겠다면서 살아온 생애를 노트에 적어 보관하신다. 일찍 여읜 아버지에 대한 회한도 적었고, 어머니의 열녀비에 새긴 문장과 찬조금을 낸 사람들의 명단과 금액도 꼼꼼히 적었다. 9남매의 특징과 현재 상태, 건강을 관리해 온 방식, 자식들에게 당부하는 말씀도 잊지 않고 기록했다. 이 많은 기록물 중에 할아버지의 생애와 관련한 일부기록이 올해 단행본으로 출간된다. 아버지를 꼭 닮은 자제들이 의기투합한 결과다. 

# 2. 지나간 봄에, 만화가 박재동 화백의 신간이 서점에 꽂혔다. 만화 아닌 만화가의 책은 ‘아버지의 일기장’이란 제목을 달고 나왔다. 제목처럼 화백의 아버지가 생전에 쓰셨던 일기를 모아 출판한 책이다. 때마침, 나도 기록으로 남지 않아 역사가 되지 못한 아버지의 삶에 매달려 있던 터라 관심 가는 바가 적지 않았다. 아버지의 삶을 돌아보려고 하는 작가의 심정은 어떤 것일지, 아버지의 지나간 삶을 재구성해 보면서 느꼈던 심사는 또 어떤 것인지, 자못 궁금했다. 유난히 뜨거웠던 지난여름 어느 날, 작가와 작가의 아버지를 읽어 내려가면서 그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작가에게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책을 내면서 일기를 읽어 보며 아버지를 만났다. 정말 그 말씀대로 옆에 있었으면서도 나는 아버지를 몰랐다.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아버지가 건강 때문에 만홧가게에 앉아 있게 된 자신의 삶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밤낮으로 고생하는 아내를 보며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리고 커가는 자식들을 향한 그리움을 어떻게 달래 왔는지 나는 참 너무 몰랐다. 나는 그냥 아버지는 늘 아버지이신 줄만 알았다.”
글에 빨려 들어가고, 작가의 심정에 공감하면 절실하게 느꼈던 소회 중의 하나는 부모와 자식 간의 문제는 ‘누구에게나 비슷하다’ 는 거였다. 가족으로서 같은 공간을 점유하고 함께 살아가지만 자식은 결코 부모를 알 수 없는 법이다. 유명한 작가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아마도, 일기장이 남아 있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는 것이 ‘아버지는 그때 왜 그렇게 했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에 관한 대답이다. 나중에 민중의 모습을 자주 그리게 된 것도 아버지의, 또 어머니의 삶으로부터 연유했다는 작가의 고백처럼 모든 자식들의 삶이 그 부모로부터 연유하고 있음을 분명히 인식한다손 치더라도 기록이 아니라면 부모의 이미지를 넘어서는 더 이상의 질문을 던지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달랑 몇 장 남아 있는 사진으로 추억을 되새기거나 가끔 몰려오는 그리움을 달랠 수 있을지언정 한 세월을 농축한 경험과 지혜를 전수받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모를 체험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방법이 자기가 부모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느끼는 소회에 머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이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껏, 양심대로 시사만화를 그리게 한 힘의 원천’이었노라는 작가의 술회는 부럽다. 아버지의 일기를 통해 다시 확인하게 되는 작가의 확신은 더욱 부럽다.  

# 3. 소설가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출간됐던 해는 2008년이다. 소설은 서점에 깔리기 무섭게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얼마 후에는 외국어로도 번역이 되고, 해외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으며, 작가가 미국 어디에선가 초청강연을 했다는 뉴스를 TV를 통해서 보았다. 소설은 그야말로 돌풍을 일으켰다. 한국의 평범한 어머니의 이야기가 세계적인 공감을 획득하고 최대 판매량을 올리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그 후로도 여러 차례 들었다. 소설에 대한 주변의 반응 역시 뜨거웠다. 당시 어느 자리에 가서도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한두 번쯤 듣지 않은 경우는 없었다. 가장 흔했던 독자들의 평론은 역시 책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다음해쯤인가, 어느 자리에선가 우연히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을 만난 건 의외의 경험이었다. 
“뭐, 별거 아니구먼. 우리 엄마 살아온 거에 비하면 일도 아니던데.” 추측컨대, 문학적인 완성도에 대한 평가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자기 어머니의 삶에 비추어 볼 때 기구한 삶도 아니더란 말이 하고 싶었을 것이다. 소설의 인기와 평단의  반응을 빼고, 다만 어머니의 삶으로만 비교했을 때 이처럼 말할 수 있는 사람들도 꽤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제법 흥미 있는 생각을 가져보기도 했다. 
문제는 기구했던 이 땅의 수많은 어머니, 아버지들의 삶이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남이 있지 못한다는 점이다. 앞에서 언급한 박종태 할아버지처럼 그들도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식민지를 겪고, 한국전쟁을 피해 피난을 가고, 또 누군가는 전쟁에 참전해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경험하기도 했을 것이다. 새마을 운동으로 초가를 스레트 지붕으로 바꾸면서 농촌부흥에 이바지 하거나 수출 산업역군으로도 살았을 것이다. 또 누군가는 유신독재와 싸우기도 했을 것이고, 감옥에도 갔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기록 한 줄 남지 않아 이들의 삶은 그를 기억하는 단지 몇몇 사람들에게 그리움이 되었을지언정 역사가 되지는 못했다. 대부분의 평범한 삶은 소설이나 아니면 자서전이란 이름으로나 혹여 그도 아니면 다른 어떤 이름으로라도 한사코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때는 바야흐로 보통사람들의 기록이 역사적으로 더 없이 소중한 자원이 되고, 사회적 자산이 되는 시대를 맞고 있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숨죽여 써 내려 갔던 우체부의 일기와 여고생의 일기도 세계문화 유산이 되었다. 중세시대 종교재판기록을 통해 남았던 이태리 시골 마을의 방앗간 주인 메네키오(‘치즈와 구더기’)의 일생은 21세기에 이르러 위대한 역사가를 만나 세기의 고전으로 다시 태어났다. 책은 다시 번역을 통해 21세기 한국의 독자들과도 만나 널리 읽히며 무한한 영감을 주고 있다. 무릇 기록의 가치는 당대에 알 수 없다.

정흥모 이야기너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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