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민 칼럼] 미디어오디세이 <2>

미디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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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의 사전적 뜻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의사소통, 즉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다. 언론학에서는 ‘메시지를 주고받는 수단(means)’ 정도로 정의하고 있다. 사람들 사이에 의미를 전달하고 공유하는 매개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커뮤니케이션이 꼭 상대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사유(思惟) 활동도 엄연히 커뮤니케이션이다. 따라서 자아와의 커뮤니케이션을 돕는 수단 역시 미디어라고 할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에서 언어는 기본이다. 인간은 언어 없이는 소통은 물론이고 사유(thinking)도 불가능하다. 그 사유의 폭을 넓혀주는 수단이 있다면 그 또한 미디어일 것이다.

캐나다의 문명비평가였던 맥루한(M. McLuhan, 1911~1980)은 일찍이 미디어를 ‘인간의 확장’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신체의 확장이요, 중추신경 및 감각기관의 확장이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미디어 말고도 도로, 의복, 가옥, 화폐, 시계, 바퀴·자전거·비행기·자동차, 무기 등도 미디어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이러한 미디어로 인해 지구는 하나의 촌락처럼 가까워졌다고 진단하였다.

경험론과 실증주의에 익숙한 학자들은 맥루한의 정의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지가 않다. 특히 감각기관의 확장이라는 견해는 탁견이다. 미디어가 감각기관의 확장이라는 정의에서 볼 때 전통적인 미디어는 물론이고, 맥루한이 언급하지 않았던 현미경과 (허브)망원경도 미디어의 범주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시각기관에 의해 포착되지 않는 미생물의 세계와 너무 멀리 있는 우주의 존재를 보여줌으로써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고 깊이 있는 지식을 제공한 결과 사유의 폭과 깊이가 무궁무진해졌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미디어가 있다. 미술이다. 미술이 미디어란 말인가? 그렇다. 예술이 아닌가? 예술의 바탕을 이루는 미디어다. 미디어 없이 미술은 없다. 미술에 대한 위키백과의 정의를 보면, “시각적 방법 또는 조형적인 방법으로 사람의 감정이나 뜻을 나타내는 예술의 한 종류”라고 되어 있다. 사람의 감정이나 의미를 표현하고 공유하는 수단이라고 하니 분명 미디어인 것이다.

매체철학과 미학을 전공한 심혜련 교수는 “매체와 예술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면서 특히 “예술은 매체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전제 아래서 매체가 예술 영역에 근본적인 변혁을 초래한다는 것, 곧 예술의 형식과 내용의 변화뿐만 아니라, 이를 수용하는 수용자의 태도도 바꾼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를테면 19세기 사진의 등장은 회화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회화의 고유한 임무가 대상을 모방하고 재현함으로써 정보와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었는데, 그 임무를 사진이 대신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미술은 정체성이 흔들리는 일대 위기를 경험하게 된다. 그 결과 흑백사진으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빛과 색을 자유자재로 표현한 인상파의 등장을 가져왔다. 이러한 경향은 후기인상파와 큐비즘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요즈음에는 뉴 미디어의 발달과 더불어 팝아트에 이어 비디오 아트가 등장했으며, 과거 미술의 소비자들이 퍼스널 미디어를 활용하여 창작자의 대열에 합류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 미켈란젤로 1498~1499년 作 <피에타>
▲ 미켈란젤로 1498~1499년 作 <피에타>

미술이라는 용어는 미(美)를 재현하거나 표현하는 기예를 뜻하는 프랑스어 보자르(beaux arts)를 번역한 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미술은 아름다워야만 하는가? 아름다움도 여러 가지다. 미적 대상에 따라 자연미와 예술미, 육체미로 분류할 수 있고, 피에타처럼 비장함이 주는 아름다움도 있다. 그래서 그리스 미술은 기하학적 비례를 중시했지만, 근대 이후에는 그러한 고정관념이 깨지기 시작했으며, 잔혹한 표현이 주는 감정의 파문도 미술이 되는 것이다.

동양의 노자는 그리스 철학자들과는 미에 대한 관념이 달랐다. “천하 사람들이 모두 미를 아름답게 되는 것으로 알지만, 그것은 혐오스러운 것이다.”(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아름답다는 게 사실은 혐오스러운 것일 수 있으니 미를 외모로만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반대로 혐오스럽게 보이는 것이 아름다울 수 있다.

▲ 뭉크의 1893년 作 <절규>
▲ 뭉크의 1893년 作 <절규>

노르웨이 화가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절규를 보자. 이 그림이 추하고 혐오스러운가? 뭉크는 이 그림을 1893년에 그렸다. 이 시기 유럽은 독점자본들 사이에 식민지 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제국주의 시대로서 제1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짙게 감돌던 때였다. 뭉크는 그러한 사회분위기를 회화라는 미디어로 표현했던 것이다. 만약 보티첼리가 이러한 분위기에서 <비너스의 탄생>을 그렸다면, 아무리 아프로디테라도 추하게 보였을 것이다.

요약하자면, 미디어란 소통의 수단일 뿐 아니라 (예술적) 표현의 수단이며 감각기관의 확장인 것이다. 이제부터 구석기시대 벽화에서부터 그리스 연극 및 미술, 회화와 조각·건축 등 동서양 미술, 현미경과 천체망원경, 미디어아트 등 전통적인 미디어의 정의를 초월하여 주요 미디어를 소재로 하여 그 시대의 의미를 읽어내는 장정을 시작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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