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흥모 칼럼] 기록이 미래다 (4)

기록은 ‘지적성실성’의 바로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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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말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저작물이 정치인들의 저서이다. 개중에 좋은 저작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는 선거용으로 급조한 저서들이 대부분이다. 그나마 자기 손으로 완성한 글도 많지 않아서 내용이란 게 허접하기 짝이 없다. 2014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다시 정치인들의 저작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벌써 출판기념회란 이름의 초청장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아마도 한두 달 후쯤에는 정치인들의 출판기념회가 봇물을 이루게 될 것이다.

개인의 기록물에 관해 고민하는 ‘이야기너머’에도 요즘 정치인들의 출판의뢰가 심심치 않게 들어온다. 지방의원들의 의정활동 기록물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귀 기울여 보지만 역시 충실한 기록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흔한 메모지 한 장 없이 써 달라는 게 대부분이다. 그간 발행했던 의정보고서에다 적당히 인터뷰를 섞어서 만들어 달라는 요구다. 돈이 없으니 비용은 싸야 한다. 출판기념회를 통해 책값을 뽑을 수 있고, 잘하면 약간의 선거자금도 만들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을 법하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의정활동의 경험과 지혜를 축적하고 전수할 수 있는 좋은 기록물을 만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서 출판까지 이어진 사례는 아직 없다.

며칠 전, 한 정치인의 저서를 소포로 받았다. 공무원 출신으로 고향에서 단체장 선거에 출마해 두 번 시장으로 일했다. 지금은 전직 정치인의 신분으로 다음 선거를 준비 중이다. 책은 짧은 단상들을 적은 것인데, 일단 외양이 화려하다. 양장본까지는 아니지만 수입지를 사용하고 글마다 삽화를 곁들였다. 여기까지는 대부분 정치인들의 책과 딱히 다를 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자기 생각을 자기 손으로 적은 글임이 분명해 보인다는 것이다. 짧은 글속에서 쓴 사람의 진정성이 느껴졌다. 시장 재직시의 경험이라 해보았자 고작 일방적인 자기주장뿐인 글이지만 직접 썼다는 건 다른 어떤 요소보다 훌륭한 덕목이 아닐 수 없다. 정치인들의 글치고 이만큼의 진정성을 담아낸 글도 찾아보기 어려운 형편이니 사람대신 책이 천대받는 일쯤은 나무라기도 어려운 게 현실이다. 

현직 공무원이거나 혹 퇴직 공무원들을 만날 때면 으레 한두 개쯤의 무용담을 듣기 어렵지 않다. 무용담 중에는 귀중한 경험담도 많아서 기록으로 남겼으면 좋겠다 싶은 내용들도 많다. 그러나 막상 그런 소중한 경험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사례는 흔치 않다. 기록으로 남지 않으니 직무를 통해 터득한 경험이나 지혜의 축적은 불가능하다. 축적이 되지 않으니 늘 같은 지점에서 새롭게 반복해야 한다. 그 대가는 우리 사회가 지불하는 비용으로 환산될 수밖에 없다.   

가령, 4년마다 치러지는 단체장 선거에서 처녀 당선한 신임 단체장들이 다음 선거에 나서면서 하는 흔히 하는 말이 그렇다. 이제 진짜 일 좀 해볼만하다는 것이다. 신임 단체장들이 행정을 배우고 익히는데 보통 3, 4년이 걸린다는 말은 거의 정설이다. 앞선 사람들의 경험과 사례가 풍부하게 남았더라면 이런 시행착오를 매번 반복하는 일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기록에는 자기가 쓰는 기록도 있어야 하고, 남이 쓰는 기록도 있어야 한다. 정치인이나 행정기관 등 공공부문의 경우 특히 그렇다. 자기 기록은 일방적으로 자기 관점에서 쓰게 되지만 제3자의 기록은 좀 더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고 쓰기 때문에 두 개의 기록은 다른 관점과 가치를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제3자의 기록이라는 것도 흔치 않다.

일설에, 미국의 기자들은 시간이 나면 ‘저술’에 매달리고, 한국 기자들은 ‘술’을 먹는다는 얘기가 있다. 따지고 보면 이 말은 거의 모든 분야, 모든 직종에도 해당된다. 직무에 관한 기록이 됐든, 취미에 관한 기록이 됐든, 기록에는 그만한 노력이 따라야 한다. 기록만큼 ‘지적성실성’을 반영하는 사례도 흔치 않다. 기록되지 않는 세상, 기록으로 남지 않는 일상은 그 사회의 지적성실성의 허술함을 반증한다.

독일에서 수백 년 된 가족기업들이 중소기업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나 일본에서 몇 세대에 걸쳐 가업을 잇고 있는 사례 등은 그 사회의 지적성실성이 얼마나 탄탄한지를 가늠하는 바로미터가 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더라도 평생 공직에 몸담았다는 사실을 명예로 여기면서도 직무와 관련한 한 줄 기록을 남기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은 전통은 결코 자랑이 되지 못한다. 엄밀히 따지면 직무유기다. 

우리사회는 전통적으로 공직에 복무하는 것을 명예로운 일로 여겨왔으며, 공직에서 이탈하지 않고 명예롭게 은퇴하는 것에 대해서도 상당한 의미를 부여해 왔다. 대부분 공직자들의 퇴임에는 마땅히 훈장이나 표창이 주어진다. 이에 반해 공직자들의 지적 활동에 대한 사명감이나 성실성을 높이 평가하려는 우리 사회의 전통이나 기준은 미약하기 짝이 없다.  

지난 2009년인가 안전행정부는 대한민국 최고 기록 공무원을 선발대회를 개최했다. 공무원들의 우수한 기록이 쏟아져 나왔다. 업무경쟁력분야에서 60개, 특이기록분야에서 34개 등 94개 기록이 최고기록으로 뽑혔다. 45년간 일기를 쓰면서 문학평론가가 된 공무원도 있었고, 4년 동안 400건 이상을 신문에 보도한 기고왕도 있었다.

지난해 수원시에서는 ‘대한민국 목민심서’가 출간돼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책은 수원시에 근무하는 팀장급 공무원들이 모여 다년간 목민심서를 공부하고 현실에 대입해 쓴 공동 저작물로 다산 탄신 100주년에 맞춰 출판했다. 출간 이후 반기문 UN사무총장이 친필 편지를 보내 격려하는 등 경사가 이어졌다.

직무와 관련한 그룹단위의 공부와 그 결과로 나오는 저작물의 출판, 공부하는 공직사회의 노력이 수원시의 전통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각계의 기대가 이어졌다. 그러나 이런 기대가 현실로 이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됐다. 그리고 이 우려는 정답이 됐다.

당장 대한민국 목민심서 한 권을 내는 데도 개인들이 호주머니 돈을 털어야 하는 게 현실이다. 해마다 고시출신 공무원들의 유학비용으로 어마어마한 돈을 쓰는 정부지만 단체 연구 활동이나 저술비용으로는 한 푼도 지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흔해빠진 게 표창이다. 그 흔한 표창도 이런 노력에는 주지 않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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