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민 칼럼] 미디어오디세이 <1>

피카소의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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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회화)을 포함하여 미술은 원래 미디어였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역사를 기록한 미술사가들은 미술의 역사를 주로 예술의 관점에서 기록했고, 언론사(言論史) 연구자들은 커뮤니케이션 및 미디어의 역사에서 미술을 거의 다루지 않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차차 얘기하기로 하고, 우선 피카소에게 미술이 표현과 기록의 미디어로서 수행하는 방식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곰브리치는 미술에 대한 피카소의 생각을 이렇게 정리했다.

“오래 전부터 우리는 사물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재현하기를 포기했다. 그것은 추구할 가치가 없는 도깨비불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순간순간 변해가는 가상적인 인상을 캔버스에 고정시키기를 원치 않는다. 세잔느처럼 가능한 한 소재가 가진 확고하고 변함없는 모습을 포착하여 그려보자.(…)단 한순간의 스냅 사진이나 꼼꼼하게 묘사된 종래의 그림보다 이상스럽게 뒤죽박죽된 형상들이 ‘실재(實在)’의 바이올린을 더 잘 재현할 수 있다”

그렇다. 피카소는 “나는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고 생각하는 대로 그린다” 라고 말한 바 있으니 정확한 평가다. 르네상스 이후의 미술이 원근법을 이용하여 보이는 대로 그리고자 했던 전통을 파기한 입체파(Cubism)의 경향으로서, 사물의 본질을 그리고자 했던 세잔느의 방식을 계승한 것이었다. 이것은 그리스 철학자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과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파르메니데스는, 인간을 포함하여 시공(時空)의 변화에 따라 바뀌는 사물은 ‘비존재’이며, ‘존재’는 시공을 초월하여 변화하지 않는 관념의 세계에 있다고 했다. 플라톤은 그것을 이데아(Idea)의 세계라고 했다. 관념 속에 있는 이상적인(ideal) 세계가 실재(reality)라는 얘기다. 플라톤에게 기하학이 중요했던 까닭이기도 했다.

그래서 후기인상파 세잔느는, 인상파의 그림처럼 순간적으로 변화하는 색과 형태만을 쫓아 그리면 본질을 잃어버린다는 생각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변화하지 않는 본질적인 형태를 그리고자 했다. 그래서 세잔느는 모든 형태를 구(球)와 원통으로 표현했다. 기하학적 세계였다. 피카소는 세잔느의 방식을 이어받아 하나의 시점에 고정하여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고 사면팔방으로 관찰하여 머릿속에 그린 입체적인 사물을 종합적으로 화폭에 옮겨놓았다. 그럼으로써 사물의 본질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 피카소 1937년 作 <게르니카>
▲ 피카소 1937년 作 <게르니카>

피카소의 작품 <게르니카>를 보자. 스페인 내전이 격화되던 1937년 4월 26일 오후, 극우세력을 배경으로 한 프랑코가 불러들인 독일 공군의 폭격기와 전투기들이 스페인 북중부의 작은 마을인 게르니카를 무차별 폭격하고 기관총를 난사해 장날을 맞아 모여 있던 1,654명을 죽게 하고 889명을 다치게 한 사건이 일어났다. 피카소는 이 천인공노할 만행을 가로 776 cm, 세로 349 cm의 대형 캔버스에 그렸다. 그는 이 그림에 대해 이렇게 썼다.

“스페인의 내분은 국민들, 즉 자유에 맞서는 반동적 투쟁이다. 예술가로서의 나는 일생동안 보수에 맞서고, 예술의 죽음에 대항하며 싸워왔다(…)지금 그리고 있는 「게르니카」라는 제목을 달 이 그림에서 나는 지금 스페인을 불행과 죽음의 바다 속으로 가라앉게 하는 군부에 대한 내 혐오감을 명명백백히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그림은 예술이기에 앞서 시대의 진실을 기록하고 표현하는 미디어다. 독점자본이  소유하고 통제하는 신문이나 방송이 외면하거나 왜곡하는 진실을 자유로운 개인은 한 폭의 그림에 그의 예술적 기능을 아낌없이 발휘하여 진실을 전달하고 분노를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이 피카소의 생각하는 대로 그리는 철학이기도 하다. “내 생각이 이런 결과를 낳으므로 나는 이렇게 그리는 것이다. 나는 수년간 이런 결과를 얻기 위해 일해 왔다.” 이런 방식으로 표피적인 현상에 대한 감각적인 사실(facts)의 나열이 아니라 그 사실의 이면에 감추어져 있는 본질, 즉 객관적 실재(實在)를 입체적으로 구성하여 기록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언론은 현상적 측면의 사실에 대해 주관적으로 전달하는데 그칠 뿐 결코 객관적 실재를 전달해주지 않는다. 스페인 언론은 프랑코를 지지하는 독점자본의 대변자일 뿐이다. 프랑코의 집권으로 내전이 종료되었을 때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은 바로 스페인 정부를 승인했다. 그리고 그 후 그들이 지원했던 독일 파시스트 정권과 무려 5천만 명이 사망한 참혹한 제2차 세계대전을 치러야 했다. 게르니카의 학살을 자행한 독일의 군사력은 소련을 견제한다는 명목으로 미국과 영국이 키워준 소산이었다. 물론 그 배후에는 군산복합체라고 하는 독점자본이 있다. 이러한 객관적 실재에 대해 독점자본 및 파시스트의 언론들은 침묵하거나 방조하였다. 심지어 애국심을 조장하며 전쟁을 미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크랄리 등 화가들은 전쟁의 본질과 참상을 그림이라는 미디어에 적나라하게 담아냈다.

▲ 피카소 1951년 作 <한국에서의 학살>
▲ 피카소 1951년 作 <한국에서의 학살>

피카소는 한국전쟁도 소재로 삼아 미군의 민간인 학살을 통렬하게 고발했다. 1951년 작 <한국에서의 학살>이 그것이다. 로봇 같은 군인들에 의해 학살당하는 부녀자 무리의 공포에 질린 모습을 묘사한 이 그림도 미술이기에 앞서 미디어다. 어찌 사람이 사람을, 그것도 무장군인이 비무장 상태의 양민을 이토록 잔혹하게 학살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사람이 아닌, 군산복합체에 의해 제조된 로봇일 것이다. 군산복합체에게 전쟁은 상품을 소비시키는 시장일 따름이다. 그리고 신문과 방송 등 전통적인 미디어는 그들의 소유이거나 통제 아래 있다.

한국전쟁 역시 소위 언론이 아무런 역할도 못하고 본질을 파헤치지 않는 가운데 화가들은 참혹한 진실을 그림으로 남겨놓았다. 김원의 <38선>, 이쾌대의 <군상 IV>, 전화황의 <피난행렬> 등이 그것이다. 해방과 더불어 독립국가 건설을 기대했던 우리 민족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어진 38선이 동족상잔 비극의 근원이라는 사실, 그로 인한 참상을 예견한 군중의 불안심리, 그리고 고난의 피난행렬 등을 담아놓은 것이다.

그림이야말로 실재를 확인할 수 있는 미디어가 아닐까? 사진, 동영상은 사회적 성격 이전에 미디어의 특성으로 보아도 현상(現象, Appearance)의 기록 이상을 담아내기에는 한계가 있다. 문학을 포함하여 예술은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고 생각하는 대로 그린 피카소의 그림이 확인해주고 있다. 미디어가 메시지다. 미디어에 대한 고정관념부터 깨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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