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다시, 미얀마의 봄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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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알 신이 미얀마 항쟁에 참여하고 있다.
▲ 카알 신이 미얀마 항쟁에 참여하고 있다.

미얀마 민주항쟁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이 뜨겁다. 이유는 그들에게서 바로 우리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가 (비교적) 단일 민족인데 비해, 미얀마는 153개에 달하는 민족이 모여 사는 다민족, 다문화, 다언어, 다종교 국가란 점이다. 미얀마에서는 버마족, 몬족, 샨족, 라킨족 등 여러 민족들이 나라의 패권을 두고 오랫동안 다퉈왔다. 16세기 이후 버마족(따웅우-꼰바웅 왕조)이 주류가 됐지만, 19세기 말 영국식민지가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카렌족, 카친족 등 소수민족들이 영국을 등에 업고 식민통치 마름, 앞잡이가 됐다. 

변화는 동쪽에서 왔다. ‘평화’라는 뜻을 가진 미얀마 옛 수도 양곤(당시는 랑군)이 1942년 일제에 점령당했다. 그 선봉에 미얀마 국부 아웅산(Aung San)이 있었다. 1915년생인 아웅산은 청년시절 양곤대학 학생운동을 이끌었으며, 1940년 영국 식민경찰을 피해 중국, 일본으로 도주했다. 그리고 동남아시아 친일파 양성기관인 남기관(南機關)에 속해 중국 하이난 섬으로 이동, 6개월간 지옥의 군사훈련을 받았다. 

결국, 일제와 함께 영국군을 몰아낸 아웅산은 1943년 8월 1일 독립행사를 연다. 괴뢰국 형태이긴 했지만, 60년 만에 나라를 되찾은 것. 이듬해 3월에는 미얀마·인도 접경지에서 동남아 역사상 최대 규모였던 ‘임팔 전투’가 발발했다. 영국군 50만 대 일본·버마독립군 20만. 승리는 영국이 차지했지만, 결과적으로 동·서 제국은 그저 서로를 소진시켰을 뿐이었다. 아웅산은 이번에는 총구를 일제로 돌렸고 영국과 협상 끝에 ‘버마연방공화국’을 세웠다. 

신생 독립국 수장은 우누(U Nu) 였다. 정부 수립을 앞두고 아웅산이 우파에 의해 암살당했기 때문이다. 역시나 우리네 현대사와 닮았다. 백범 김구 선생의 최후가 오버랩된다. 아무튼 초대 총리 우누는 ‘불교 사회주의자’로서 나라를 피다우타(Pyidawtha), 혹은 낙토(樂土)로 이끌고자 했다. 1955년 반둥회의(아시아-아프리카 회의) 를 주도했고, 1961년 제3대 유엔(UN) 사무총장 우단트(U Thant)을 배출했다. ‘미얀마의 봄’이었다. 

하지만 네윈 장군이 이끈 쿠데타 (1962년)로 짧은 봄이 끝났고 지금까지 군부 독재가 이어지고 있다. 군부 독재에 맞서 민주화를 향한 미얀마 국민들의 투쟁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1988년 8월 8일, 이른바 ‘8888’ 혁명부터 2007년 ‘샤프란’ 혁명까지. 차이가 있다면 이번 시위는 Z세대로 불리는 청년·여성들이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과거’와 ‘미래’의 싸움이다. 하지만 UN은 소극적이고 미얀마 군부를 지지하는 나라들이 생각보다 많다. 항쟁이 내전으로 격화되면 외부 개입 자체가 힘들어진다. 

그렇다고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순 없다. 장기기증 유서를 품고 시위 과정에서 숨진 19살 소녀(카알 신)의 얼굴을 도무지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34년, 혹은 41년 전이 그곳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부에, 그리고 미얀마 군부와 연결된 각종 기업·기관들에 더 많은 제재를 촉구한다. 개인이라면 미얀마 민주주의 네트워크 같은 단체에 작은 성금이라도 기 부할 수 있겠다. “Everything will be OK” 반드시 그러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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