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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의 탄생과 학살의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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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4.04  12:5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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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봄, 어느 날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제주의 연리 마을에 무장한 경찰들이 나타났다. 간밤에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산사람들이 마을로 내려왔다가 싸움이 벌어졌다. 다음 날 아침 경찰들이 민가를 뒤지기 시작했다. 소년의 집에 들이닥친 경찰은 ‘아들, 어디 갔어’라고 할아버지를 다그쳤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징용 가서 돌아오지 못했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다. 그 시절, 청장년이 없는 집은 모두 산으로 도망간 ‘빨갱이’ 집으로 낙인찍히던 때였다. 경찰관과 젊은 청년들이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끌어갔다. 소년이 두 분을 뒤쫓아 가자 할머니는 못 따라 오게 말렸다. 할머니는 끌려가면서 ‘하늘님, 하늘님’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경찰관과 청년들이 마을 주민들을 데리고 간 지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갑자기 마을이 소란스러웠다. 대성통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을에서 끌려간 28명 모두 총살당했다.

3․1절 기념행사 때 경찰 발포 사건이 계기가 되어 시작된 제주도 주민들의 격렬한 시위와 미군정과 경찰, 우익청년단의 무자비한 탄압은 4․3 무장 봉기로 이어졌고, 결국에는 단독정부 수립반대 항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토벌대와 무장대 간의 전투가 소강상태에 있다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난 뒤인 10월부터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시작되었다. 1948년 10월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5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참혹한 학살이 일어났다. 4․3항쟁 전 기간 동안 3만 명의 넘는 사람들이 ‘빨갱이’로 죽은 것이다.

제주에서 ‘빨갱이’는 처음에는 공산주의 이념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키다 점차 중간산 지역과 같은 특정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로 대상화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빨갱이’ 대상화는 중간산 마을뿐만 아니라 토벌대가 통제하고 있는 해안마을의 주민에게까지 확장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제주도=‘빨갱이 섬’으로 지역 전체가 규정되었다. ‘빨갱이 섬’(조병옥 경무부장) 또는 ‘작은 모스크바’(김재능 서북청년단 제주단장)에 거주하는 제주도민은 거주하는 그 자체만으로 적으로 규정받기에 이르렀다. 제주도민은 새로운 반공국가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적대적 ‘종자’의 위치로 전락한 것이다. 제민일보 4·3 취재반이 조사한 학살의 증언들을 보자.

1948년 12월 하순께부터는 소개민에 대한 학살극이 시작되었다. …군인들은 구좌면 월정리 중앙국교에 주둔한 ‘특별중대’ 소속이었다. …특별중대 군인들은 덕천리 소개민들을 끌고 가 며칠간 고문 취조하다가 12월 25일 김녕지서로 넘겼다. 지서에서는 곧바로 민보단까지 동원해 이들을 철창으로 살해했다.(󰡔4․3은 말한다󰡕5)

토벌대의 조직 방식과 노하우는 만주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일본은 괴뢰 만주국에 세 개의 조선인 친일 조직을 운영했다. 행정계통의 간도협조회, 경찰계통의 신선대, 그리고 군 계통의 간도특설대를 창설해 활용했다. 간도특설대는 장교를 제외하면 조선인으로만 구성된 특수부대로서 항일세력과 전투를 치루는 부대였다.

간도특설대는 창설일 부터 일제가 패망하여 해산될 때까지 일본군과 합동 또는 단독으로 간도, 열하성, 하북 등으로 이동하면서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을 상대로 모두 108차례나 되는 ‘토벌’작전을 벌였다. 매달 평균 한 번 이상 ‘토벌’에 나간 셈이다. 그들은 항일전사와 무고한 민간인들을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강간, 약탈, 고문 등을 일상적으로 저질렀다. ‘인간 백정’이라는 별명이 달리 나온 것이 아니다. 중국 공안당국이 조사한 간도특설대의 대표적인 만행 사례 한 가지만 들겠다.

1944년 10월, 특설부대는 정보반에서 제공한 정보에 따라 석갑진에서 약 20리 떨어진 마을을 덮쳤다. 이 마을에 팔로군 식량과 복장이 매장되었다는 정보를 얻고 특설부대는 이 마을에서 식량 40여 포대와 신발 40여 켤레, 그리고 소 3마리를 잡았다. 도중에 또 팔로군 한명을 칼로 살해했다. 같은 해 음력 8월 1일, 특설부대는 다시 석갑진에서 동쪽으로 약 60리 떨어진 동장화 마을에서 팔로군에 대한 토벌을 감행했다. 날이 밝자 이 마을 사람들은 특설부대가 온 것을 발견하고 도망쳤다. 특설부대가 마구 총을 쏘아 민간인 한명이 총에 맞아 죽고 한 임신부는 다리에 총을 맞아 수수밭까지 겨우 기어갔는데도 토벌대는 잔인무도하게 그녀의 배를 찔러 태아까지 흘러나오게 했다.

제주에서 토벌대 수뇌부는 ‘초토화작전’ 기간 중에 “산사람의 목을 잘라오면 승진을 시켜준다”고 했는데 이는 전과 올리기와 교육의 일환으로 요구한 것이다. ‘도민=빨갱이=적’을 죽이라는 토벌대 수뇌부의 명령은 토벌대원들의 살상행위를 정당화시켰으며 그들을 살인기계로 만들었다.

제주도를 빨갱이 지역으로 규정하고 학살을 저질렀던 이데올로기는 베트남에서의 민간인 학살을 거쳐 1980년 광주에서도 되풀이되어 나타났다. 광주민중항쟁 당시 광주뿐만 아니라 주남마을을 비롯하여 광주 외곽 지역에서 일어났던 군에 의한 주민 학살은 제주도민 학살의 재판이었다.

피로 얼룩진 민주화의 결과 ‘광주사태’가 ‘광주민중항쟁’으로 바뀌었으나 학살자는 처벌받지 못했다. 오히려 그동안 전두환 씨의 학살 부인과 함께 지만원 씨의 간첩 소행이라는 빨갱이론이 시장에 공공연하게 유포되어 왔다. 과거청산이 제대로 되지 못함에 따라 이런 학살 부정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가해자를 처벌하지 못한 채 피해자의 피해회복에만 초점을 맞춘 과거청산이 결국 학살부정과 혐오발언들이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이제 그 잘못을 끝내야 한다.

제주 4·3항쟁에서 졸지에 고아가 된 그 소년은 이제 일흔 여덟이 되었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온몸으로 견뎌냈던 그가 뇌출혈로 병상에 누워 있다. 제주 4·3항쟁 71주년을 맞이하여 하루빨리 진실이 규명되어 그의 몸과 마음이 치유될 수 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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