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혁명과 촛불혁명,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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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하야 촛불
▲ 박근혜 하야 촛불

1960년 4월 혁명이 있은 지 6개월 후인 10월 11일, ‘4월 혁명 부상자동지회’ 회원들이 목발에 수륜차를 굴리며 민의원 의사당에 난입하여 의사당 단상을 점령하였다. 의사당이 시민들에 의해 점령당하는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민주당의 신·구파 의원들이 데모대가 지켜보는 앞에서 정쟁을 지양하고 혁명입법을 하루빨리 완수하겠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수라장은 정리되었다.

4월 혁명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이승만․자유당 정권청산의 문제, 즉 부정선거 원흉의 처리문제, 반민주활동자의 처벌문제, 부정축재자 문제에 대한 철저한 청산이 필요했다. 이승만․자유당 정권의 청산은 곧 극우반공세력의 핵심을 청산하는 일로서 검찰과 경찰, 사법부를 개혁하는 일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부정선거 원흉을 처단하려면 혁명입법이 필요했다.

4월 26일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직후부터 최인규 등 3․15정부통령선거 당시 장관이나 자유당 기획위원들이 거의 다 구속되었으나, 과연 시민들이 바라는 대로 철저하게 처리될 것인가 하는 의문은 처음부터 제기되었다. ‘이승만 체제’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현직 검사들과 판사 대부분이 이승만 정권과 직간접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국회의원 다수는 여전히 자유당 수중에 있었다. 6월 25일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통과되긴 했으나 부정선거 원흉과 발포 책임자의 처벌, 부정축재의 회수 등 4월 혁명을 완수할 특별법을 제정할 근거를 만들지 않았다.

김병로 등 뜻 있는 인사들은 속히 혁명입법을 제정할 것을 요구했지만 7월 29일 총선으로 정권을 잡은 장면 정부도 허정 과도정부와 마찬가지로 매우 미온적인 태도를 취했다. 9월 9일 서울변호사회는 ‘특별법제정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비민주행위자 및 부정축재자특별처벌법안’을 작성해 국회에 건의하기로 했다. 언론과 한국교수협회에서도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였다.

이승만을 옹호하는 등 갖가지 이유를 대면서 변호사들이 무죄를 주장하는 가운데 9월 26일 검찰은 내무부와 경찰 책임자인 최인규․이성우․이강학․최병한 등에게 사형을, 자유당 기획위원들에게는 4년 6개월에서 15년을, 국무위원이었던 송인상․신현확 등에게는 12년 등을 구형했다. 중형을 선고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내무부 관련자를 제외하고는 언론에서 주장한 국가변란죄, 국가보안법 등을 적용하지 않고 허위공문서 작성, 횡령, 직무유기 등을 적용했다.

설마 하던 사태가 마침내 일어났다. 10월 8일, 부정선거와 관련된 이른바 6대사건에 대한 판결은 경형, 형 면제 등 시민들의 바람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선고였다. 최인규 등의 부정선거 혐의는 선거법 불비를 이유로 판결 대상에서 배제했다. 발포명령사건의 경우 서울시경 국장 유충렬과 경비과장 백남규에게만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했고, 홍진기(내무부장관), 조인구(치안국장), 곽영주(경무대 비서관)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장부통령저격 배후조종사건, 정치깡패사건, 선거사범, 제3세력제거 음모사건 등 다른 사건들에서도 대부분 경형 또는 무죄를 선고했다.

▲ 민의원 단상을 점령한 4월 혁명 부상자들
▲ 민의원 단상을 점령한 4월 혁명 부상자들

판결이 나온 날 마산에서는 1,000여명이 철야데모에 들어갔고, 서울의 모든 경찰은 돌발사태에 대비해 완전무장했다. 여론이 극도로 험악해진 것이다. 10월 9일 ‘4월 혁명 부상자동지회’는 “국회 해산하라”는 ‘삐라’를 돌리며 시위를 하다가 윤보선 대통령을 면접한 후 해산했다. 그리고 이틀 뒤인 11일 민의원 의사당을 점령했다. 정치에 대한 전면적 불신이었다.

시민들의 분노와 여론에 떠밀려 10월 17일 민의원은 3․15부정선거 관련자와 반민주행위자의 공민권 제한, 그리고 부정축재자의 처리에 대해 소급입법권을 부여한 특별재판부․특별검찰부 설치를 골자로 한 개헌안을 발의하고, 11월 22일 민의원 본회의에 반민주행위자 공민권 제한 법안을 상정하였다. 개헌은 신속히 이루어져 11월 29일 정부에 이송되었고, 이에 기초하여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안’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안’ ‘부정축재특별처리법안’ ‘특별재판소 및 특별검찰부 조직법안’ 등 4개의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특별법에 따른 조사와 처벌은 장면 정부의 소극적 태도와 기득권 세력의 조직적인 저항으로 큰 성과를 내지 못했고 그것마저도 5·16군사쿠데타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기나긴 반동의 시간들이 도래했다.

촛불혁명이 있은 지 두 해를 보내면서 필자는 자꾸 악몽 같은 4월 혁명 이후가 떠오른다. 보수정치인들이 혁명 초기에는 침묵을 지키며 눈치를 보고 있었으나 사실상 이들의 영향력을 제어할 수 있는 정치적 장치는 별반 없었다. 그들은 영악하게 이걸 잘 알고 있었다. 소나기는 언젠가는 지나가리라. 보수세력들의 잘못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시민들의 여론과 열정이었지만 혁명 이후의 일상은 그것을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없었다. 일상으로 돌아간 시민들에게 ‘국가 부재’라는 비상사태를 해결하도록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대신 그 역할을 새롭게 권력을 잡은 정부와 집권당에게 부여한 것이다.

그러한 환호와 기대는 잠시. 여전히 국회에는 기득권 세력들이 똬리를 틀고 앉아 혁명이 요구하는 개혁들을 방해하고 있다. 그렇다고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에게 면죄부를 줄 수도 없는 일이다. 애당초 국회 과반을 넘기는 의석수를 갖고 있다 해도 국회선진화법이라는 장애물 때문에 개혁 입법이 순탄치 않을 판이었다. 의석수도 거기에 미치지 못한 데다 정치력을 발휘해서 우호적인 야당을 끌어안을 전략도 없었던 것 같다. 촛불로 인한 개혁의 열망은 컸으나 그것을 실현시켜 줄 현실의 정치 공간은 매우 빈약한 상황이었다. 여기에 관료들의 태업에 가까운 태도는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대통령의 지지율의 취해 상황을 오판한 것일까.

아니면 지방선거에서 이기면 이 모든 한계들이 극복되리라 생각했던 것일까. 대통령의 지지율이 40%대로 떨어진 지금, 촛불혁명을 계승했다고 하는 현 정부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보수세력의 막무가내식 몽니부리기와 더불어민주당의 전략적 인식 부재와 안이함, 관료들의 태업은 결국 다시 시민들로 하여금 직접행동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한 2019년의 봄은 아직 멀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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