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 14일 공무원노동자 총파업은 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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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무원노조 특별법 반대 총파업 전야제에 참여해 결의를 다지는 조합원들(2004.11.14)
▲ 공무원노조 특별법 반대 총파업 전야제에 참여해 결의를 다지는 조합원들(2004.11.14)

“안 받겠습니다. 우리 남편이 뭘 잘 못 해서 이따위 종이 쪼가리를 받으라고 집까지 왔나요! 당장 돌아가세요!” 아내가 파면장을 들고 온 직원에게 일갈한 분노 어린 외침이었다. 2004년 12월 15일, 나는 이렇게 공직생활 17년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2004년 11월 14일 총파업의 막은 올랐고, 노동2권도 아닌 1.5권 반쪽짜리 공무원노조특별법 입법 저지와 노동3권 쟁취를 위한 총파업 투쟁으로 수배 구속된 간부는 조합 임원과 본부장, 지부장 등 40여 명, 해직된 동지는 444명, 정직 등 중징계를 당한 동지는 2,608명에 달했다. 소청, 소송 등으로 많은 동지들이 복직되었지만 결국 136명의 동지는 오늘도 뜨거운 콘크리트 바닥에서 새우잠을 자며 무심한 청와대를 향해 구호와 피켓을 하늘 높이 치켜들고 있다.

그저 주는 대로 받고 시키는 대로 일만 하던 순진한 ‘정부미’(공무원)들이 ‘특별법 폐기 노동3권 보장’을 요구하는 역사상 최초의 공무원 총파업에 나선 것은 그냥 몽니를 부린 철없는 투쟁이 아니었다.

공무원의 노동3권은 제헌헌법에도 보장되어있고 ILO 국제노동기구에서도 지속적인 권고가 있었으며 OECD 가입 조건이기도 하였다. 이와 더불어 우리보다 10년 앞선 전교조의 선구자적인 투쟁으로 교원노조법과 공무원직장협의회가 만들어졌지만 그들이 피를 흘리며 만들어낸 길에 올라선 우리 공무원들은 직장협의회법에 안주할 수도 또 해서도 안 되었다.

교원노조법의 한계인 온전한 노동3권을 보장받기 위한 험난한 투쟁을 해야 할 당위가 있었다. 그것이 50여 년에 이르는 복종과 굴종의 세월에 종지부를 찍고 공직사회 개혁을 온전히 이룰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고 전교조 1,500여 명 해직동지들의 희생에 대한 보답이었다.

우리 공무원노조는 직장협의회의 안위를 걷어차고 가시밭길인 법외노조를 설립하고 ‘집단행동 금지’라는 공무원법을 어겨가며 연가파업 투쟁 등 부단하게 더욱 가열찬 투쟁을 벌여 나갔고 결국, 90만 공무원노동자의 전면적인 총파업 투쟁을 성사시켰다.

11월 4일 노무현 정권은 공무원노조 위원장을 비롯한 지도부에 대해 검거령을 발동하고 체포에 나섰다. 부위원장이었던 나는 이미 8개월 전에 민주노동당 지지 선언과 공무원의 정치자유선언으로 수배와 체포, 수감생활 2개월을 겪은 상태였기에 오히려 담담하게 수배망을 피해 잠행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경찰은 수배령과 함께 내 휴대전화는 물론 집 전화, 아내의 휴대폰, 부모님 전화에 도청장치를 걸어 놓았고, 나의 이메일 및 신용카드 등에도 모두 위치 추적을 걸어 놓았다. 집 주변에는 체포조가 상주해 있었다.

하지만 한번 수배경험이 있었던 나는 이에 대비한 준비도 철저히 해 두었다. 조합에서 다른 사람 명의의 비밀휴대폰을 받았고 아내도 지인의 휴대폰을 잠시 빌려 놓아 필요할 때 소통할 수 있도록 조치해 놓았으며, 내 차 번호가 수배될 것에 대비해서 친구 차와 바꾸어 타고 도피활동을 하였다. 친구가 수배된 내 차를 타고 이동 중 불심검문을 받은 적도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나중에 둘이 크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때는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넘어가는 계절이었기에 차량 통행이 뜸한 한적한 도로가에 차를 세워 두고 찬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을 상념에 젖어 바라보며 오늘은 어디서 어떻게 하루를 지낼까 고민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 해직자 원직복직 촉구하는 김정수 조합원
▲ 해직자 원직복직 촉구하는 김정수 조합원

12월 1일, 영등포에 있는 조합사무실에서 지도부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하니 잠입하라고 비밀 휴대폰으로 연락이 왔다. 인근 한적한 곳에서 조합 상근동지가 준비한 차량 뒤 트렁크에 몸을 싣고 조합건물 입구를 통과하여 7층 사무실에 잠입하는 데 성공했고 9일간 단식농성을 끝내고 같은 방법으로 건물을 빠져나오는데 성공했다. 만일 트렁크 검색을 했다면 영락없이 체포되었을 것이다.

그 해 연말연시가 왔다. 가족이 그리웠다. 비밀 휴대폰으로 아내와 통화했다. 12월 마지막 주를 집에서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아내는 거실의 커튼을 빛이 새지 않는 두꺼운 재질로 바꾸어 놓았고 마침내 집으로 들어가는 날 지하주차장에는 경비 아저씨가 마중 나왔고 지하 비상 계단통로 문을 열고 2층 집에까지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다. 2005년 1월 1일까지 거실의 두꺼운 커튼이 내려진 감옥 아닌 감옥(?)생활을 마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다시 길거리로 나왔다.

하지만 공무원노조 특별법은 2004. 12. 31 자정을 기해 국회 본회의를 통과 하고 말았다. 찜질방, 모텔, 모 본부장 등의 은신처 등에서 잠을 자며 수배망을 피해 지역 동지들을 만나면서 63일간의 기나긴 수배생활 속에서 투쟁했지만 끝내 특별법을 막지 못한 분노와 설움은 더 치밀어 올랐다. 2005. 1. 7 자진출두 기자회견을 끝으로 서울구치소로 향했다.

2004년 우리는 그렇게 투쟁했다. 하지만 역사는 우리를 배신하지 않았다. 노무현 정권이 부정했던 공무원노동자의 노동3권을 문재인 정권은 이제 헌법개정안에 담고 있다. 문재인 정권은 결자해지에 진정으로 동의하는가? 피맺힌 노동, 투쟁의 역사는 다시 묻고 있다.

이제 남겨진 과제는 노동3권과 그것을 주장하다 해직된 136명의 원직복직과 명예회복이다. 오늘도 회복투(희생자원상회복투쟁위원회)는 뜨거운 태양이 이글거리는 청와대 길목, ‘길바닥’에서 노숙투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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