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 우리에겐 꿈일까?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본소득, 우리에겐 꿈일까?

한국의 근로기준법에는 ‘무노동 무임금(No Work, No Pay)’의 원칙이라는 게 있다. 자본가들이나 경영진들이 노동자들과 임금 협상을 할 때 흔히 쓰는 말이다. 일을 하지 않는 노동자에게는 임금을 주지 않는다는 것, 이것은 “일한 만큼 대가를 주는 게 자본주의 사회의 원칙 아니냐?”는 논리와 결합돼 매우 그럴싸한 권위를 갖는다. 노동자들이 권익을 찾기 위해 파업이라도 하려고 치면, 자본가들은 어김없이 나타나 이렇게 외쳤다.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
그런데 이런 거 생각해 본 적 있나? 인간은 먹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 말이다.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는 말이 근본적으로 성립하지 않는 이유는 인간은 일단 먹어야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부터 출발한다.

일단 태어났으면 살아있을 권리가 있다
기본소득이 내포하는 뜻은 매우 간단명료하다. 국가가 모든 국민 각자에게 아무 조건 없이 매달 일정액을 지급한다는 것이다. 이 사상은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기본적 특징을 정확히 꿰뚫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인간의 노동력은 ‘살아 있어야’ 제공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수요가 어떻고 공급이 어떻고 들먹이기 전에, 최소한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그 사람이 살아있을 권리를 부여하자는 뜻이다. 이게 어려운 사상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이건 그야말로 상식 중의 상식에 속하는 이야기다.
 

문제는 온 국민에게 매월 일정의 소득을 제공하는 데 필요한 돈이다. 이 돈이 너무 막대할 것으로 예상되다보니 기본소득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기본소득은 생각만큼 돈이 많이 드는 제도가 아니다. 기본소득은 기존의 복지 정책을 모두 유지한 채 실시되는 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의 또 다른 근본정신은 선별적 복지, 즉 자격을 확인한 뒤 복지 혜택을 주는 제도가 비효율적이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가난한 사람, 실업자, 특정 조건에 놓인 노인, 소득이 낮은 농민…, 이 사람들을 일일이 분류해 그에 맞는 복지 혜택을 주는 데 행정비용이 너무 들어간다는 이야기다.

보편적 복지의 결정판, 기본소득은 결코 꿈이 아니다
그래서 복지는 보편적으로 하고 과세는 누진적으로 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부자를 골라내는 것이 가난한 사람을 골라내는 것보다 훨씬 쉽다.
예를 들어 월 소득 100만 원 이하인 사람을 쉽게 ‘가난한 사람’으로 규정할 수 있나? 뒤져보면 10억 원짜리 집이 있을 수 있는데? 직장이 없다고 무조건 ‘가난한 사람’으로 규정할 수 있나? 알고 보니 아버지가 이건희인데? 이래서 가난한 사람은 선별이 어렵다.
 

반면 부자는 구별하기 쉽다. 월 급여 1,000만 원 이상이면 그냥 부자로 보고 소득세율을 높게 매기면 된다. 보유한 집 가격이 10억 원 이상이면 그냥 부자로 보고 재산세 많이 부과하면 된다. 복지는 보편적으로, 과세는 누진적으로 하는 것이 효율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기본소득은 바로 이 보편적 복지의 결정판이다. 즉 기본소득 제도를 실시하면 다른 복잡한 복지제도는 대부분 폐지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래서 생각만큼 돈이 많이 들지 않는다. 게다가 이 제도를 실시하면 실업자 가려내느라, 가난한 노인 골라내느라 드는 행정비용도 대부분 없앨 수 있다.
2016년 4.13 총선에서 기본소득을 공약으로 제시한 정당은 두 곳이었다. 녹색당이 월 40만 원, 노동당이 월 30만 원의 기본소득을 각각 공약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두 당이 획득한 정당지지율은 1%에도 미치지 못했다. 당연히 국회의원을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이게 한국사회가 기본소득을 대하는 현실이다.
 

하지만 기본소득은 결코 ‘꿈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만약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국가들의 평균 수준만 세금을 부담해도 월 30만 원의 기본소득 재원은 금방 마련할 수 있다. 조세부담률을 북유럽 국가 수준으로 높이면 월 50만~60만 원의 기본소득 재원도 조달이 가능하다.
우리가 돈이 없어서 기본소득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기본소득을 ‘꿈같은 일’로 여기는 이유는, 실상 그 꿈을 제대로 꾸어본 적조차 없기 때문이다.
 

진실로 자문해보자. 우리가 단 한 번이라도 ‘인간이라면 태어난 이상 살아있을 권리가 있다’는 사회적 합의를 해 본 적이 있었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21세기가 시작된 지 18년이나 지난 오늘날, 컵라면으로 점심을 때우던 한 청년이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끼어 목숨을 잃는다. 그걸 구제하자며 최저임금을 올릴라 치면 “시간당 8,350원의 최저임금이 너무 많아서 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헛소리가 나온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이라면 태어난 이상 살아있을 권리가 있다’는 기본적인 꿈을 잃어버린 현실에서 출발한다.
 

제발 꿈을 꾸자. 꿈을 꾸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자. 우리는 벌 받으며 살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꾸는 이 꿈은 모든 국민에게 ‘살아 있을 권리’를 보장해주는 기본소득이라는 제도 위에서 활짝 꽃 필 수 있다.

SNS 기사보내기
저작권자 © 공무원U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주요기사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