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사회의 아이히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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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년 간 역사교과서 문제, 과거사 문제, 3.1운동100주년 기념사업 문제 등으로 여러 부처의 관료들과 이런 저런 회의를 가질 기회가 있었다. 당사자들이 알면 불편하고 불쾌하게 들리겠지만 그 만남에서 필자는 자주 무력감과 허탈감을 느꼈다.

필자도 10여 년 전 3년가량 ‘짝퉁’ 공무원 생활을 한 적이 있다. 돌이켜 보면 당시는 매우 활기가 찼던 것 같다. 문제가 생기면 그 원인을 두고 갑론을박하고, 적용한 해법이 답이 아니라고 결론 났을 때는 새로운 해법을 찾기 위해 여러 시도를 했다. 그렇다고 해서 관료사회의 본질적 속성인 보수성이나 안정지향성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새로운 일을 시도할 때 제기될 수 있는 부담과 책임감을 굳이 지면서까지 일을 추진하려는 관료들은 흔치 않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정책 기조의 변화에 적응하는 노력을 하긴 하나 기왕의 제도와 관습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게 본질에 가까울 것이다. 이는 유사 이래 관료사회가 생겨나면서 나온 속성일 게다. ‘수령은 과객이고 아전이 주인이다’는 조선시대의 이야기나 ‘창조경제’라 붙어 있던 보고서 표지만 ‘사람 중심의 경제’로 바꿔 제출한다는 말이 관료제의 정곡을 찌른 우스개라 할까.

그렇다 해도 이건 너무 심하다 싶을 정도다. 지금의 관료사회는 무기력하다 못해 무능하다고 말하는 게 더 적절할지 모르겠다. 난다 긴다 하는 실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무능하고 무기력하게 공공의 사안을 다루고 있나 싶을 만큼 큰 벽을 느낀다. 시민사회와 함께 일하는 방법도 아예 잊어버린 것 같다. ‘민관 협치’는 책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용어가 되 버렸다. 중장기는커녕 단기적인 전망이나 계획조차 제대로 없다. 도대체 지난 10년간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관료사회가 이렇게 망가져버린 걸까.

‘정권의 코드와 맞지 않은 사람은 옷을 벗어라’고 하던 장관의 협박과 ‘참 나쁜 사람’으로 찍혀 과장직에서 쫓겨났던 사건이 상징하고 있듯이 다른 생각은 물론 상식적인 보고조차 견제 받거나 봉쇄되고 심지어는 쫓겨나는 일까지 벌어져 관료사회를 얼어붙게 만들었을 것이다. 대신 그 자리에는 코드에 충실한 언어와 실행계획들로만 가득 찼다.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는 일은 이제 소용없는 짓이었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사유의 무능력이 말하기의 무능력을 가져오고, 말하기의 무능력이 공감의 무능력을 가져옴으로써 홀로코스트와 같은 대량학살이 가능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권위에 대한 맹목적 복종이 평범한 사람들을 ‘괴물’로 만들 수 있다는 ‘악의 평범성’ 또는 ‘악의 진부성’을 지적함으로써 홀로코스트 논쟁에 새로운 안목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녀의 지적은 뛰어난 통찰력을 제공하고 있다. 이 비판은 관료사회가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병폐를 지적할 때도 자주 인용된다.

지금 필자 책상에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진상조사 결과보고서>(교육부, 2018.3.28)와 <조사보고서>(사법행정권 남용의혹 관련 특별조사단, 2018.5.25) 두 개가 놓여 있다. 이 보고서 속에는 많은 아이히만들이 등장한다.

교육부 조사팀은 역사교과서 국정화 과정에서 청와대 공직자와 교육부 고위관료 다수가 ‘직권 남용과 국가공무원법상의 성실․공정․품위유지 의무’를 위반했으며, 일부는 허위공문서작성과 업무상 배임 혐의가 있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보고서 말미에 “교육부는…단지 ‘청와대 지시’, ‘장․차관의 지시’라는 이유로 많은 위법․부당 행위를 기획하고 실천했다.

공무원이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서 공익을 추구해야 할 책무를 잊어버릴 때, 해당 분야의 전문가로서 정체성을 견지하면서 성실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을 때, 우리 사회의 밝은 미래는 요원할 것이다.”라고 썼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과정에서 일어난 위법 행위와 그런 ‘농단’이 가능하게 된 교육부 내부의 조직 문화를 점잖게 비판한 것이다.

이런 비판에 “위에서 시키는데, 우리 보고 어쩌란 말이냐”라는 볼 멘 소리가 나올 수도 있다. 보고서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부당한 명령을 거부해 불이익을 당한 극소수의 공무원들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오해하지는 마시라. 용기와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을 지지하고 보호하는 조직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감히 말 할 수 있는 조직’이 지켜졌더라면 농단은 제어될 수 있다. 이 조직 문화는 누군가가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촛불은 광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관료 사회 안에서도 촛불은 항상 켜져 있어야 한다. 관료 사회가 다시 활기를 되찾고 자유로운 언어와 생각들이 넘치는 모습을 언제 보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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