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과 이재용은 염호석, 최종범 두 열사 앞에 사죄부터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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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의소리 이완배 기자
▲ 민중의소리 이완배 기자

2014년 5월 18일 서울의료원 강남분원에 무장병력 300여 명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그들은 절규하는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노동자들에게 캡사이신을 뿌리고 염호석 열사의 시신을 탈취해 갔다. 그때 우리는 확신했다. 이들은 인간이 아니라 악귀라고 말이다.

2018년 4월 17일 삼성그룹의 계열사인 삼성전자서비스가 지금까지 간접고용 형태로 착취해 오던 노동자 8,000명을 직접고용으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했다. 잘된 일이다. 아니, 잘 된 일을 넘어 기쁜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무노조 경영이라는 반(反)헌법적 방침을 무너뜨린 이 기쁜 소식을 우리는 누구에게 먼저 전해야 할까? 당연히 전국금속노동조합 삼성전자서비스지회의 설립 투쟁 과정에서 꽃다운 목숨을 바친 염호석, 최종범 두 열사에게 전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염호석 열사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패륜적인 삼성이 경찰을 부추겨 염호석 열사의 시신을 탈취해 갔기 때문이다.

삼성이 간접고용 노동자 8,000명을 직접고용으로 전환한 것은 절대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재용의 상고심을 앞두고 수 천 건의 노조와해 문건이 발견되면서 검찰 수사가 강화되는 와중이었다. 삼성은 “검찰 수사와 별개로 애초부터 그렇게 하려고 했던 일”이라고 주장하는 모양인데 웃기는 소리다.

삼성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염호석, 최종범 두 열사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일이다. 삼성은 사람을 죽이고도 태연했고, 심지어 열사의 시신을 탈취해가고도 태연했다. 분명히 말하는데 염호석, 최종범 두 열사는 삼성 당신들이 죽였다. 당신들은 살인범이다.

 

삼성전자서비스지회의 눈물겨운 출범

삼성전자서비스는 삼성전자가 판매한 가전제품의 수리를 담당하는 곳이다. 당연히 고객들은 이 서비스가 삼성전자로부터 제공되는 줄 안다. 하지만 삼성은 삼성전자서비스라는 자회사를 만들고 수리 업무를 위탁했다. 게다가 삼성전자서비스조차 직고용이 아니라 협력업체를 통해 수리기사 노동자들을 공급받았다.

수리기사 노동자들은 당연히 삼성전자의 이름으로 노동을 한다. 이들을 통제하는 곳도 삼성전자서비스다. 그런데 정작 이들은 삼성전자서비스의 노동자가 아니다. 이런 걸 위장도급이라고 부른다. 한마디로 이런 구조 자체가 불법이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2013년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했다. 76년 동안 이어졌던 삼성의 무노조 방침을 뚫고 마침내 삼성에 민주노조가 설립됐을 때 참 많은 사람들이 울었다. 노동자들은 노조를 통해 ‘우리도 이제 사람 대접을 받겠구나’라는 희망에 부풀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삼성의 악랄한 노조 탄압이 시작됐다. 삼성의 노조파괴 문건에는 “노조에 참여하면 폐업한다고 협박하라”거나 “내근 조합원을 외근으로 돌려라”, “조합원에게 욕설과 폭력을 가하라”, “법정 공휴일인데도 휴가원 안 내고 쉬면 결근으로 처리하라” 등의 사악한 수법이 명시돼 있었다.

삼성은 노조를 대놓고 무시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정식으로 노조가 출범을 했는데 삼성은 시쳇말로 ‘쌩을 까버렸다’. 당시 노조의 주요 요구는 “임금을 올려달라”거나 “직접고용을 보장하라”는 게 아니었다. “성실하게 교섭하라”가 주요 요구였다. 무슨 협상을 하려고 해도, 얼굴을 보여야 협상을 할 것 아닌가. 삼성은 이렇듯 철저히 노조의 존재 자체를 유령처럼 취급했다.

최종범, 염호석의 죽음

최종범 열사는 2013년 10월 31일, 열사의 고향인 천안 한 숲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삼성전자서비스 천안센터에 속했던 열사의 당시 나이는 32살이었다.

최종범 열사는 살아 생전 성실함의 표본 같은 노동자였다. 그러면서도 최종범 열사는 노조가 결성되자 가장 선두에 섰다. SNS를 통해 주변 동료들에게 열성적으로 노조 가입을 권했다.

숨지기 1년 전에 결혼을 한 최종범 열사에게는 아주 예쁜 딸이 하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생계는 나날이 악화됐다. 열성 노조원인 그에게 회사가 일감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최종범 열사가 숨진 곳은 그의 차 안이었는데, 백미러는 청테이프로 덕지덕지 고정돼 있었다. 백미러를 수리할 돈조차 없는 삶이었다.

최종범 열사는 금속노조에서 교육을 받은 뒤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부끄럽지만 전태일님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노조 깃발 올렸으니까, 우리도 이제 열심히 싸우면 되는 겁니까?”

최종범 열사는 10월 30일 처음으로 무단 결근을 했다. 그날 밤 동료들과 술을 마시며 열사는 “비수기가 이제 시작인데, 눈 오기 전부터 너무 힘들다. 형들도 나도 일감이 없고…”라고 이야기하고 대성통곡했다. 이튿날 최종범 열사는 “전태일님처럼 그러진 못해도 전 선택했어요. 부디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라는 유지를 남기고 고향집 나무 숲 앞 승용차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이듬해 5월 17일,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부산양산센터 염호석(당시 34) 분회장이 정동진 한 공터 아반테 승용차 안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다. 염호석 열사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 직전인 5월 12~14일 이재용 부회장과의 면담을 요구하는 2박 3일 노숙 투쟁을 벌였다.

염호석 열사가 노조를 시작한 이후 받은 급여는 3월 70만 원, 4월 41만 원이었다. 노조에 적극 가담한 그에게 회사가 일감을 주지 않은 탓이었다. 그는 유서에서 “더 이상 누구의 희생도 아픔도 보지를 못하겠으며 조합원들의 힘든 모습도 보지 못하겠기에 절 바칩니다. 저 하나로 인해 지회의 승리를 기원합니다. 저의 시신을 찾게 되면 우리 지회가 승리할 때까지 안치해 주십시오. 저희가 승리하는 그 날 화장하여 이곳에 뿌려주세요”라고 적었다.

분명히 염호석 열사는 자신의 시신이 동지들 옆에 남기를 원했다. 이게 무슨 대단한 요구인가? 월급 올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이재용을 구속하라는 요구도 아니었다. 그냥 시신을 동지들 옆에 있게 해 달라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경찰이 300명이 넘는 무장경력을 동원해 영안실을 급습했다. 그리고 염호석 열사의 시신을 탈취해 가버렸다. 밀양 화장장에서도 경찰 수 백 명이 동원돼 열사의 유골을 들고 튀어버렸다. 이 일에 삼성이 개입했다는 심증은 차고 넘친다.

삼성이 이 두 노동자를 죽였다. 단지 헌법에 보장된 노조 활동을 하려 했다는 이유로, 단지 사람답게 살아보자는 꿈을 가졌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리고 잔인하게도 열사의 시신까지 탈취해갔다. 이런 자들이 지금 와서 아무런 사죄 없이 얼렁뚱땅 넘어가려 한다.

다시 말하지만 삼성전자서비스의 노동자 직고용은 잘된 일이다. 그마저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당연히 해야 될 그 일을 하는 것과 별개로, 인간답게 살겠다는 꿈을 가졌다는 이유로 세상을 떠난 이 두 노동자에 대해 사죄를 하는 게 먼저 아닌가? 그리고 왜 열사의 시신까지 탈취해 갔는지, 시신 탈취 과정에 삼성이 얼마나 개입했는지 그 죗값을 받는 일이 먼저 선행돼야 한다.

두 열사의 꿈이었던 직고용이 이뤄진 지금, 삼성의 사과를 받아내고 죄를 단죄하는 과제가 여전히 우리에게 무겁게 남아있다.

▲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이 '최종범열사 추모-살인자본 삼성 규탄 열사정신계승 결의대회'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 = 민중의소리
▲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이 '최종범열사 추모-살인자본 삼성 규탄 열사정신계승 결의대회'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 = 민중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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