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이향재 동지를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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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쯤으로 기억한다.

광주남구공무원노동조합(전국공무원노동조합 광주본부 남구지부의 전신)에서 홍보부장을 하고 있을때, 필자와 같은 부서 직원의 남편분이 시청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한다고 해서 어떤분인지 궁금 했던 차에 지역공무원노조 회의에서 처음 이향재 동지를 뵈었다.

그후 필자는 시청으로 전입을 갔고2011년 3월 노동조합위원장 선거에서 이향재 동지께서 당선되어 필자에게 사무총장을 제안 하셨고, 고심끝에 제안을 수락하면서 이향재 동지와 본격적인 인연이 시작됐다.

이향재 동지는 노동조합 활동에서 항상 새로운 방법을 고민하시는 분이셨다. 기존의 틀에 박힌 사업을 지속적으로 반복하기 보다는 새로운 방식으로 바꾸는 것을 운영위회의에 제안을 하셨고, 이는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이향재 동지는 연설을 잘 하시지는 못했다. 많은 사람들 앞에 서면 부끄러워 하시곤 했는데, 그럼에도 특유의 넉살좋은 웃음과 행동으로 시청 직원분들과 허물없이 지내는 분이셨다. 특히 여성직원분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이향재 동지는 노동조합 사업을 할때는 눈빛이 달라지는 분이셨다. 특히 사측과의 투쟁이 결정되면, 가장 앞장서서 투쟁을 계획하고 실천하는 분이셨다. 그중에서도 성희롱,막말 고위공무원 사퇴투쟁은 가장 모범사례로 꼽힌다.

2011년 11월 광주시 산하 사업소에서 성희롱과 막말 때문에 조합원이 실신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연락을 받은 이향재 동지는 바로 병원으로 찾아갔으며 긴급 부서 조합원간담회를 소집하였다.

부서간담회에서 “이 투쟁이 승리하려면 위원장 혼자서 투쟁하는것이 아니라 부서 조합원들이 함께 투쟁해야 승리할수 있다”고 역설하였고, 고위공무원의 갑질을 만천하에 알리게 되었다. 또한 직접 성명서를 작성, 게시판에 게시하도록 조직하여 결국 자진 사퇴하게 만들었다.

이향재동지 전화 컬러링은 ‘동지들 앞에 나의 삶은’이라는 곡이었다.

이 노래는 이향재 동지의 생각과 행동을 그대로 반영하는 노래였다.

곧 있으면 이향재동지를 떠나보낸지 4주기가 된다.

생전에 “전국공무원노동조합에 당당하게 가입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던 동지의 꿈을 남은 동지들이 결국 해냈다.

내 마음속에는 영원한 위원장으로 남아계신 이향재 동지, 이제 ‘열사’라는 이름으로 공무원노동조합 역사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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