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국의 또다른 이름 토사구팽

우리함께 역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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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단체 일진회의 배후로 알려진 다케다와(가운데)와 매국노 송병준(왼쪽), 일진회장 이용구. 친일파 송병준의 후손들은 지금 국가를 상대로 토지 소유권 확인소송을 하고 있다.
▲ 친일단체 일진회의 배후로 알려진 다케다와(가운데)와 매국노 송병준(왼쪽), 일진회장 이용구. 친일파 송병준의 후손들은 지금 국가를 상대로 토지 소유권 확인소송을 하고 있다.

애초에 그는 3천만 엔을 받기로 했었다. 나라 팔아먹는 값으로는 싼 가격이었지만 당시의 물가를 감안하면 개인이 받을 금액으로는 엄청난 돈이었다. 쌀 한 가마니 가격이 얼추 1엔 정도였으니 말이다.

1909년 이용구는 그가 주도한 일진회를 앞세워 한일합방 청원운동을 벌였다. 그는 가쓰라 타로(桂 太郞) 당시 일본 수상에게 소요되는 비용 3백만 엔을 요구했다. 그러자 가쓰라 타로는 배포 크게 “3백만이 아니라 3천만이라도 주겠다.”며 한일합방 청원을 독려했다.

그러나 막상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일본정부가 그에게 준 돈은 고작 15만 엔 정도였다. 그것도 일개인인 그에게 준 돈이 아니라, 회원 수 25만 명에 이르는 일진회라는 단체에 준 돈이었다. 더구나 단체 해산 명목이라는 교묘한 꼬리표를 붙였다.

결국 그는 한일합방을 위해 일제가 써먹고 버린 쓰레기에 불과했다. 즉, 토사구팽(兎死狗烹) 당한 것이었다. 이렇게 일본정부가 자행한 배신의 충격이 너무 컸던 탓일까. 아니면 울분 때문이었을까. 병이 든 그는 한일합방 2년 뒤, 1912년 고향이 아닌 낯선 이국의 땅 고베(神戶) 스마(須磨)에서 투병 끝에 죽고 말았다.

▲ 이용구 그는 한때 동학 지도자였다가 친일단체 일진회의 회장으로 한일합방에 앞장서는 대표적인 매국노였다.
▲ 이용구 그는 한때 동학 지도자였다가 친일단체 일진회의 회장으로 한일합방에 앞장서는 대표적인 매국노였다.

44세의 나이로 죽은 그 역시 어느 누구 못지않게 나름 파란만장 인생을 살았다. 22세에 동학에 입교하여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하는 등 애국주의자 면모를 보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동학혁명의 패배는 그를 친일파의 길로 변절시켰으며, 마침내 매국노란 이름의 주홍글씨가 붙은 채 죽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참 바보짓을 했어요……혹시 처음부터 속았던 것은 아닐까요?”

이처럼 그는 죽기 얼마 전, 지인에게 후회의 말을 남겼다. 하지만 개개인이 일제 앞잡이가 되어 낳은 행위 결과는 엄청난 비극을 낳았다. 현재도 일본의 비겁한 장난으로 식민지시대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한 통계가 잡히지 못한 비참한 현실이지만, 물적·인적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라 전체가 유린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고, 이름도 낯선 인도네시아의 섬으로 끌려가 일제 앞잡이로 사용되다 마침내 전범으로 몰려 억울한 죽음을 당한 조선 청년이 얼마나 많은가.

또한 일본군성노예로 물건처럼 취급받다 죽거나 살아나 치욕스런 트라우마(trauma)를 겪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일제 세뇌교육의 결정판인 가미가제 독고다이(神風 特攻隊)가 되어 공중에서 폭발된 자 또 얼마인가.

매국노 이용구를 떠올린 것은 단순한 회고가 아니다. 값싼 대가의 결과로 값비싼 희생을 치러야했던 이 땅의 살아 죽어간 젊음이 너무 허망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고통은 개별적이라지만 그 대가가 너무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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