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은 대한민국 사회를 바꿔야 하는 운동의 시작점이다

<기획연재> 이제는 적폐청산 ③ 세월호 진상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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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16 연대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과정에 대해 말씀해 달라.

 

그날 오전에 20여 명의 시민들과 함께 남영동 대공분실 기행 해설을 진행 중이었다. 언론에서 세월호 보도가 나오고 바로 전원구조 되었다는 소식에 홀가분한 마음이었는데 나중에 보니 오보였다. 그 충격이 너무 컸고, 선뜻 개입하기가 미안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어이없는 상황들이 벌어져서 단체 후배들과 함께 전국대책위를 만들어보자고 건의했다. 유가족들에게 정치적 의도로 비쳐질까봐 걱정스럽기도 했다. 대책위 활동의 기본은 언제 어디에서나 ‘유가족 곁에 있자’는 것이었다. 2014년 5월 8일 유가족들이 심야 버스를 타고 KBS 항의방문를 왔는데 날씨가 꽤 쌀쌀했다. 농성을 해본 적이 없는 유가족들에게 방석, 이불, 식수 등을 공수해서 제공했는데 처음엔 유가족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아 달라’, ‘우리끼리 해결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다가 전국적인 서명 운동을 벌이면서 대책위 활동을 함께 하기 시작했다.

 

2. 지난 3년간 4·16연대 활동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와 감동 받았던 때가 있다면?

 

가장 힘들었던 때는 작년에 특별조사위가 강제해산 당할 때였다. 원래 특별법에 따르면 2017년 2월 4일까지 조사기간이고 3개월 동안 보고서 작성기간이다. 당시 광화문광장에 농성 중이었는데 아무것도 한 일 없이 해산당한 것이다. 또 개인적으로는 2014년 10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안산에 형님이 사셔서 장례식장을 안산에 차렸는데 연고도 없는 박래군이 왜 여기까지 왔냐며 2016년 총선 준비하려고 여기까지 왔냐는 오해도 받았다. 정권이 바뀌고 나서는 ‘청와대에서 전화 안 오냐?’는 질문을 받으면 황망하다. 3월 10일 새벽에 유가족들이 모여서 목포신항으로 내려가는데 박근혜 탄핵결정소식을 들은 엄마들이 환호하는 목소리에 차에서 잠이 깼다. 그때의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 백남기 어르신 돌아가셨을 때 세월호 유가족들이 서울대병원을 함께 지키면서 타인을 배려하고 약자를 위해 함께 하고자 하는 모습을 봤을 때 감동이었다. 누가 가르쳐줘서가 아니라 본인들이 느낀 것을 나눠주는, 국가 폭력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함께 위로하고 도와주는 모습에서 고마움을 느꼈다. 이런 힘으로 살고 있다.

 

3. 1,700만 촛불은 적폐청산 과제 중의 하나로 ‘세월호 진상규명’을 요구했으나 박근혜 탄핵결정문에서는 세월호 참사를 탄핵심판의 판단 대상에서 제외했다. 이에 대한 의견과 함께 앞으로의 전망은?

 

수백 명의 국민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국가의 수장이 7시간 만에 나타나서 ‘구명조끼를 입었는데 왜 구조 하지 않았냐’는 등의 헛소리를 한다는 게 과연 상식적인 일인가. 충분히 구조할 수 있었는데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게 문제이다. 설령 대통령이 없는 상황이더라도 국가의 컨트롤 타워마저 작동하지 않았던 것은 명백하게 박근혜와 청와대의 책임이다. 촛불혁명 과정에서 밝힌 청와대의 변명은 전부 거짓말이었고 사건을 은폐하기에 급급했으며, 시민의 목소리조차 듣지 않았다. 촛불시민혁명적폐청산특별위원회에서 위원장을 맡으면서 긴급 현안으로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을 통과‧발의했는데 국회가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한 일은 고작 선체조사위원회를 구성한 것밖에 없다. 지난 촛불 과정에서 퇴진행동이 세월호에 집중하지 못한 점도 아쉽다. 촛불혁명의 힘으로 탄생한 문재인정부가 화려한 고공행진을 하고 있지만 과연 이후에 법 제정과 예산지원 등 문제 해결 과정에서 국회의 벽을 넘을 수 있을 것인지 걱정이다. 대통령령에 의해 기간제 교사 순직인정은 가능했지만 ‘2기 특조위 구성’, ‘사회적 참사에 관한 특별법 제정’은 12월 본회의에 상정은 되겠지만 자유한국당이 107석이나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통과가 될 것인지는 미지수다.

 

4.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비망록 관련 보도에 따르면 청와대의 세월호 참사 은폐 지침이 나온다. 이에 대한 의견은?

 

사건이 심화되는 과정이 크게 3가지이다. △안전규제 완화 등 운항 자체가 불가능했던 세월호의 의혹 △골든타임에 구조하지 못한 과정 △마지막으로 사건을 조작·은폐하는 과정이다.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밝혀내기 위한 유가족들과 시민들의 요구를 박근혜가 자신의 권력을 동원해 막으려고 했으나 진상규명에 대한 국민적 요구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이전의 경우를 보면 정부는 애도를 표하고 보상금을 지불하고 유가족들의 입을 막았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결집된 힘으로 돈보다 진상규명을 분명히 요구했고 가족들의 상당 부분이 국가배상소송에 들어갔으며 지금까지 함께 하는 시민들 역시 광화문광장을 떠나지 않고 자신과의 약 속을 지키고 있다. 3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전국적으로 100여 개 정도의 시민모임이 이루어지고 있다. 앞으로가 중요하다. 어쨌든 문재인정부가 세월호 진상 규명에 대한 약속을 했고 지킬 것이라 생각하면서 우리의 대응이 서서히 사그라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약속을 믿어보겠지만 하반기 투쟁은 준비 중이다.

 

5. 경제적 보상 부문은 가장 민감하기도 하고 조심스럽다. 2014년 당시 언론에서 국민 성금으로 모아진 액수를 잘못 보도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단원고 학생 한명에게 지급할 보상금이 8억 2천만원이라는 것은 허구이다. 세월호 관련 특별법이 두 개 가 있다. 국무총리 산하의 ‘세월호 진상규명특별법’과 ‘피해자구제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있다. 보상심의위원회에서 2015년 4월 1일 열 린 첫 회의에서 이미 보상심의를 결 정해 왔다. 단원고 학생들에게 4억 2천만 원을 먼저 지급해주고 청해진해운에서 구상권을 청구해서 지급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4시 간 뒤 언론보도에서 8억 2천만 원으로 발표됐다. 그것의 실체는 여행자 보험 1억 원, 국민성금 1/n로 3억을 더해서 8억 2천만 원이 된 것이다.

정부의 숫자놀음이었다. 당시 유가족들은 광화문에서 노숙농성을 하고 있었다. 당시 유가족들의 요구는 ‘온전한 세월호 인양’과 ‘시행령 폐기’였으며 ‘우리를 돈으로 모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우리 요구는 단 하나, 아이들이 왜 그렇게 죽었는지 그 진실을 알고 싶을 뿐이다. 이것 을 다 무시하고 언론에 발표하니 유가족들은 바로 그 다음날 4월 2일 50여명이 광화문광장에서 삭발식을 했고 안산에서 서울까지 아이들 영정을 들고 걸어오셨다. 더 이상 돈으로 유가족을 모욕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6. 문재인정부는 최근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 운영 및 조사활동비 11억 4400만원을 지출하는 안건을 의결했다지만 정작 목 포신항의 수습 노동자들은 하청업체로부터 받는 임금이 체불되는 상황이라 한다. 이에 대한 의견은 어떠신지?

 

지금 목포신항에 가면 세월호를 정면도 아니고 측면에서 바라보게 되어 있고 그 거리 또한 상당하다. 해수부 관료들은 모든 것을 비공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천안함의 경우 끌어다 놓고 만져보게 하고 안보교육 한답시고 전시행정하고 있다. 6월 30일 김영춘 해수부장관 취임 이 후 안산에서 유가족을 만났고 선체 공개를 요구해서 서울에서 버스 두 대가 내려가서 선체를 확인했는데 그 다음 주에 다시 막아버렸다. 미수습자 가족들을 동원해서 갈등관계를 유도하기도 한다. 대통령만 바꿨을뿐이지 관료들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7. 촛불의 힘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를 향해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4·16연대의 목표는 유가족의 목표와 같다. 진상규명, 책임자처벌은 꼭 해결해야 한다. 안 그러면 또 반복 될 것이다. 유가족 중 세희아빠 임종호씨는 23년 전 서해 페리호 사건 당시 의경으로 차출되어 나가서 유가족들 앞을 막는 일을 했다. 세희아빠는 가끔 말한다. ‘그때 당시 특 별법을 제대로 만들고 진상규명을 명확하게 밝혔으면 우리 아이가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우리는 오로지 진상규명과 책임자처 벌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선체조사위원회가 미수습자 조사를 하는 중이고 아직 밝혀진 것은 없지만 문재인 당시 후보의 ‘세월호 참사와 가습기살균제 피해 진상규명’에 대한 약속을 믿어보겠다. 대한민국은 4·16 이전과 그 이후로 나뉜다. 안전에 대한 불감증, 먹거리에 대한 안전성, 구의역 청년의 죽음 등 안전사회로 나아가야 할 과제가 많다. 그리고 함께 하는 사람들의 가치관에 대한 문제 인식도 필요하다. 이 운동의 시작이 4·16운동이다.

 

8. 1988년 동생 박래전 열사의 분신으로 본격적인 인권운동가의 길을 걸어오셨다고 들었다. 이렇게 많은 일을 척척 해내는 원동력은 어디서 나오는지?

 

원동력은 없다. 해야 할 일이 보여 서 할 뿐이다. 지금은 유가족들 걱정뿐이다. 유가족들은 몇 년째 활동하면서 목포신항도 가야하고 간담회, 토론회도 가야하고 너무 너무 고생이 많다. 유가족분들의 경제적인 면도 걱정이 된다. 우리에게 4·16은 대한민국 사회를 바꿔야 하는 운동의 시작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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