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항쟁, 우리의 위대한 유산

역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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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와 치약이 없으면 하루도 보내기 힘든 나날이었다. 학교로 가는 버스 안은 학교에 가까워질수록 최루탄의 매캐한 농도가 점점 높아졌다. 1987년 6월 캠퍼스엔 낭만이 없었다. 학교로 들어서기까지 과정도 버거웠다.

▲ 1987년 6월항쟁 당시 진압 경찰
▲ 1987년 6월항쟁 당시 진압 경찰

학교 주위는 온통 우중충한 방석복과 헬멧을 뒤집어 쓴 전투경찰과 진압경찰(일명 백골단)들로 가득했다. 한 낮의 태양아래 무료한 그들이 이따금씩 내지르는 함성과 쓸데없이 흔들어대는 방패·진압봉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위협했다. 여차하면 달려들 것만 같아 눈을 내리 깔고 지나가야 했다. 괜스레 그들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미친개를 만난 격이었다. 신분증을 보자는 것은 차라리 애교였다. 불콰한 얼굴을 들이밀며 시비를 걸곤 했다. 시간이 남아도는 그들의 재미삼아 시작된 행태에 맞서다보면 자칫 경찰버스(일명 닭장차)에 끌려가 애먼 구타를 당하기 일쑤였다.

죄가 있고 없고는 다음 문제였다. 대낮에 피로 얼룩진 옷가지를 여미며 거리를 돌아다녀도 별로 이상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구타를 당해 시퍼런 멍이 생겨도 어디에 하소연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옳고 그름을 따지다보면 급기야 특수공무집행방해라는 무시무시한 죄명이 더해져 재판에 넘겨지기도 했다.

1987년 6월 하늘은 쫒기고 쫒는 회색빛이었다. 1979년 12·12 사태로 등장한 전두환 군사정권은 방송국과 신문사를 통제했고 국가 권력의 요직을 차지하며 강제연행과 불법구금을 자행했다. 지금과 비교 자체가 안 되게 무차별적으로 공권력을 남발했다. 그럼에도 국가폭력에 맞선 국민적 저항은 비겁하지 않았다.

6월 항쟁은 군사정권에 맞선 국민들의 분노가 활화산같이 폭발된 저항이었다. ‘4·13 호헌조치 철폐’, ‘직선제 개헌 요구’ 구호가 메아리치는 동시에 최루탄과 페퍼 포그(Pepper Fog)의 시커먼 유탄들이 허공을 갈랐다. 사람들은 애꿎은 눈물만 차고 넘치게 흘렸다.

▲ 1987년 6월항쟁 당시 민주화투쟁을 하고있는 대학생들
▲ 1987년 6월항쟁 당시 민주화투쟁을 하고있는 대학생들

과거 없는 현재 없고, 현재 없는 미래 없다. 어제 일인 듯 눈에 선한 1987년 6월 항쟁의 노도와 같은 함성과 눈물을 그저 치기어린 저항이라 말할 순 없다.

오늘날 우리가 평화롭게 집회와 시위를 가질 수 있는 것도 이러한 6월 항쟁의 토대가 있었기에 가능한 때문이다.

 

또한 촛불혁명과 같은 명예혁명을 이뤄낼 수 있는 씨앗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6월 항쟁은 우리의 위대한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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