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정신 계승 민주노총 평화순례를 다녀와서

4·3 진실규명, 제주를 평화의 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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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양수(광산구지부 조합원)
▲ 유양수(광산구지부 조합원)

나에게 4월의 제주는 유채꽃, 벚꽃, 초록의 보리밭과 푸른 바다가 돌담과 어우러진 강렬한 원색의 아름다움으로 기억되는 섬이다. 이런 제주를 ‘평화’라는 주제를 가지고 그것도 ‘순례’의 형식으로 제주 4·3정신 계승 민주노총 평화순례에 동참하게 됐다.

제주라는 섬에 어떤 평화의 의미가 있었던가? 나의 무지함에 대한 부끄러움과 또 다른 설렘을 갖고 제주로 향했다.

평화순례의 첫 방문지는 4·3사건으로 인한 민간인 학살과 희생자들의 삶을 기억하고 추념하기 위한 4·3평화공원. 공원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공원 한쪽의 알 수 없는 수많은 표석들이었다. 4·3사건 와중에 언제, 어디서, 어떻게 영문도 모른 채 사라져 그동안 시신을 거두지 못해 분묘도 마련하지 못한 행방불명 희생자들의 영혼을 추모하기 위한 표석이라는 해설사의 말에 숙연해짐과 동시에 4·3이라는 역사적 체험공간에 순례의 첫발을 들여 놓았음을 실감했다.

 

4·3희생자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위령제단에서 참배를 마치고 희생자들의 죽음을 하나하나 새겨놓은 수천 명의 각 명비를 지나 4·3 평화기념관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 기념관에서는 본격적으로 4·3의 전개과정, 수만 명의 제주도민이 국가에 의해 학살당하게 된 사연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제주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행사를 하던 도중, 경찰의 말에 아이가 치였는데도 경찰이 이를 무시하자 제주 도민들이 이에 항의하였고, 경찰의 진압 도중에 시위 군중을 향해 총을 발사하여 6명의 사람이 죽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를 규탄하는 시위가 연일 벌어지며, 제주도민 95%가 참여하는 민관 합동 파업이 벌어지는 등 시위가 확대되어갔다. 이를 위해 미군정에서 진상규명 차원의 조사단을 파견하였는데, 남로당의 좌익적 선동에 초점을 맞춘 보고서가 작성되고, 이때부터 제주도민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탄압이 극에 달하자, 자체적인 무장대를 조직하고 1948년 4월 3일 경찰서 등을 습격하며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 직후 서북청년단과 군인들이 육지에서 파견되어 폭력을 자행하고, 급기야 해안에서부터 5km 이상의 지역에 금족령을 내리고, 그 지역에 위치한 마을들을 전부 소개하고, 마을 주민들을 학살하는 사태가 발생. 제주도민의 10%가 되는 2만여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고 추정될 정도의 남녀노소 가릴 것 없는 집단 학살이 발생하게 된 사건” 으로 이러한 4·3에 대한 설명들이 당시 사진과 관련 기록, 생존자들의 증언, 해설 글 등이 다양한 주제로 전시되어있었다.

4·3의 발단 및 전개과정뿐만 아니라 이후 복구와 후유증 진상규명 운동까지 4·3전반에 대해 알 수 있었다.

특히 인상적인 공간은 토벌대에 의해 민간인 수십 명이 질식당한 다랑쉬동굴 재현현장과 백비. “백비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고 비어져있는 비석을 말하며” 아직도 4·3이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 사건이라는 것을 상징한다고 한다.

4·3평화공원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일제시기 제주도민들을 강제동원해 자신들의 전쟁 전초기지로 이용한 알뜨르 비행장에서부터 송악산 해안 진지동굴, 제주 4·3 당시 예비검속 학살 터였던 섯알오름 등 제주의 역사적 아픔을 간직한 유적지를 차례로 순례했다. 그리고 현재진행중인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현장까지... 제법 빠듯한 일정이었지만 아름다운 섬으로만 기억됐던 제주의 역사적 상처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답사여서 시종 해설사의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여 가며 지진하게 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튿날 제주4·3항쟁 69주년을 맞아 제주시청 앞에서 진행된 민주노총 노동자대회 참석을 끝으로 이번 평화순례를 마무리 하였다. 이번 평화순례를 통해 ‘국가에 의해 수없이 많은 제주도민이 희생당한 사건’이라는 막연한 이해에서 벗어나 무고하게 희생당한 제주도민들의 넋을 위로하고 제주 4.3전반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는 지난 2007년 제주도를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했다고 한다. 지정근거로 여러 가지를 들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광복이후 일어난 제주 4·3사건의 폐허를 딛고 일어난 제주 사람들의 의지와 화해 상생정신을 평화의 개념 속에 담았다고 한다.

내년에는 더 많은 조합원들이 4·3평화순례에 참여하여 제주 4·3을 통해 평화와 인권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이제 나에게 제주는 평화의 섬으로 기억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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