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기록 넘어 국가-비선-자본의 야만의 통치사 폭로

우리는 고 김영한의 비망록을 막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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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죽은 자는 말이 없고, 김기춘과 우병우 등은 살아남기 위해 궤변으로 일관한다. 그런 와중에 각하는 헌재에서의 반격 기회를 엿보고, 최순실은 사악한 범행을 부인하려 든다. ‘국회 최순실 국정농단 게이트 진상 규명을 위한 조사 특위’라는 긴 이름의 청문회에 선 저들은 참으로 여유롭다. 그것을 지켜보는 우리가 오히려 미칠 지경이다. 박근혜-최순실-이재용 게이트의 진실, 국가-비선-자본 커넥션의 진상은 과연 드러날까? 특검이 악착같이 각하와 삼성을 쫒으니, 독일검찰이 최순실 일당의 비밀계좌를 추적 중이라니, 여기에 마지막 희망을 걸어야 하는 건가?

한가하게 지켜볼 수만은 없는 우리다. 그래서 할 게 있는가? 있다. 김영한 비망록 재독을 나는 독자 제위와 함께 할 당장의, 바로 우리가 짊어질 과제로 제출한다. 현 정권을, 오늘의 국가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다. 물론 김영한의 행적에 대한 정치적, 역사적 평가는 냉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고인이 남긴 기록에는 우리가 더욱 유념할 필요가 있다. 정권 핵심으로부터 유출된 희귀한 정치적 텍스트, 통치의 회의록이기 때문이다. 그의 유품인 비망록에서 우리는 민주공화국 통치의 실제적 면목을 긁어내야 한다. 그것을 대한민국 정치의 실상으로서 역사에 남겨야 한다. 고인이 던진, 의도치 않은 과제다.

민간인 김영한은 2014년 갑자기 세상에 얼굴을 다시 내민다. 보다 정확히 말해 그해 6월 12일 목요일, 그는 제3기 청와대 참모진 신임수석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것이다. 새누리당 의원 안종범(경제), 여성가족부장관 조윤선(정무), 전 서울교육대 총장 송광용(교육문화) 수석과 함께였다. 무명의 그가 청와대 민정수석에 깜짝 발탁된 것이다. 홍경식이 총리 후보자 낙마 등 전반적인 인사 검증 실패 책임을 지고 10개월 만에 물러난 자리다. 국민여론 및 민심동향을 파악하고, 민원 업무를 처리하며, 무엇보다 공직과 사회 기강, 법률 등과 관련해 대통령을 보좌하는 역이다.

그런 중요 직책에 비춰볼 때, 검찰 내부를 장악한 실세 친박 인맥으로부터 동떨어진, 검찰 내부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57세 ‘듣보잡’의 청와대 입성이었다. 모두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발탁이었다. 사실, 청와대의 이런 임명에 당시 언론매체들은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조윤선, 안종범에게만 주목했다. 이는 정치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돼지저금통 사건 관련자를 무리하게 기소한 이력을 들고(새정치연합), 공안검사출신을 비판했지만(정의당), 그에 대한 야당의 관심은 현저히 낮은 편이었다. 과연 그는 어떤 카드, 어떠한 선택이었을까?

▲ 故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과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김영한 전 민정수석은 그가 청와대에서 근무한 2014년 6월부터 2015년 1월까지, 청와대 주요 회의 내용과 지시사항을 기록한 꼼꼼한 업무일지를 남기고 지난 8월 급성간암으로 사망했다. 사진 = JTBC 뉴스 화면 갈무리
▲ 故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과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김영한 전 민정수석은 그가 청와대에서 근무한 2014년 6월부터 2015년 1월까지, 청와대 주요 회의 내용과 지시사항을 기록한 꼼꼼한 업무일지를 남기고 지난 8월 급성간암으로 사망했다. 사진 = JTBC 뉴스 화면 갈무리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불과 2개월이 되지 않은, 2014년 초여름의 일이었다. 아이들의 집단수몰로, 7시간 대통령의 미스터리한 실종으로 한국사회 전체가 아수라장이 되어 있을 때였다. 여기에 문창극 총리 지명자의 발언으로 세간의 여론은 더욱 시끄러워졌다. 새 총리 내정자에 대한 사퇴 압력이 드높았을 때의 일이다. 기춘대원군이 비판여론에도 불구하고 각하의 신임을 받고 비서실장으로 유임되어 건재를 과시하는 상태에서, 크게 주목받지 않던 공안검사 출신 김영한이 청와대 새 진용에 발을 들여놓았다. ‘TK’의 화려한 복귀였나? 검찰 내부도 놀란, 권력 주변에 있지 않은 의외의, 예상치 못한 카드의 발탁이었다.

사실, 세월호 이후의 국면관리를 위해 청와대는 친정체제 마련에 바빴다. 위기의 각하를 보위하는 전열의 정비였다. 이정현이 물러난 홍보수석 자리에는 이미 윤두현 YTN 플러스 사장을 임명해 놓은 상태였다. 이런 세팅에 포함되는 것이기에, 김영한의 선발은 결코 무시할 일이 아니었다. 대체 그는 어떻게 기회를 잡았는가? 그에게 위임된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이 공안 검사 출신은 과연 어떤 기능의 발휘를 위해 청와대를 장악한 권력 실세, 혹은 청와대 밖의 비선 실세에 의해 간택이 된 건가? 불통의 정권 한 복판에서 소통능력을 의심받은 새 민정수석은 무슨 임무를 수행하게 될 것인가?

우리는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망각하면 안 된다. 다름 아닌, 경북 영주출신이자 사시 29회로서 김영한의 TK 검찰 후배인 우병우가 김영한에 한 달 앞서 청와대 민정비서관으로 기용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당장 민정수석실의 실세로 활약한다. 민정수석실 내 고위직을 모두 TK 출신으로 교체한다. 청와대 안팎에서는 영남 출신의 우병우 민정비서관이 파견 검찰 직원들의 인선 제시안을 뒤집으면서까지 이번 인사에 적극 개입했다는 이야기가 파다했다. 수석 김영한의 그늘에 숨어 그는 막강한 실권을 잡아 간다. 그런 와중에 김영한이 수석으로 픽업되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얼굴마담으로 내세워진 게 틀림없는 김영한의 비망록이다. 글쓴이 김영한은 꼼꼼하고 성실한 사내였음에 틀림없다. 그는 임명 받고 첫 출근한 날부터 회의 내용을 상세하게 자신의 노트에 기록한다. 언제부터 이런 기록 습관을 갖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의 돋보이는 장점이다. 아무튼 그는 그 이전에는 접해보지 못했을 전혀 다른 차원의 국정회의 이야기를 첫날부터 자신의 다이어리에 받아 적는다. 청와대라는 문양이 오른쪽 위편에 떡하니 새겨진, 청와대 내부자들만이 가질 수 있을 일지며, 그 노트가 살아남아 현 정권의 야수적 통치양상들을 세세하게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비망록(備忘錄).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 자신이 접한 사건이나 주요하게 관찰 내용을 기억에서 망실되지 않도록 대비해 기록에 남기는 메모(memorandum)이다. 개인적인 일기(日記)에 해당할 수 있는데, 작성자가 공인이고 그 내용이 공적인 성격을 가질 때 단순히 사적인 기록에 그치지 않는 일종의 사회적 텍스트가 된다. 이런 메모, 비망록은 정치학에서는 물론이고 역사(연구)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다중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현장의 중요한 유물, 진상규명의 구체적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당사자 개인이 사적인 지면에 진솔한 심경으로 기술한 텍스트인 비망록은 그런 까닭에 진실성의 가치를 인정받는다.

김영한 비망록이 딱 그러하다. 국가기관 핵심의 이야기를 기록한 회의록이 사적인 소지품이기에 바깥으로 유출되고, 그것이 고인의 유품으로서 가족들에 의해 잘 보관되다가, 진실 규명의 용도로써 사회적으로 전용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 텍스트는 현재 매우 제한적으로만 유통될 따름이다. 그것을 소지한 일부 매체에 의해 서둘러 독해되어 부분적으로 ‘특종’이라는 이름으로 시중에 보도되고 있다. 국회의원들에 의해 증인을 추궁하는 용도로 쓰인다. 몇몇 단체가 그것을 해독해 발표하고 있지만, 내용 파악은 부문운동 수준에 그친다. 텍스트의 포괄적 독해, 심층적 해독, 문맥적 재독은 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렇게 둘 회의의 텍스트, 그러고 끝낼 비망의 텍스트가 아니다. 텍스트의 사회 공통이익을 위한 공간(公刊)․개봉의 정치적 판단이 시급하다. 이 텍스트는 더 이상 사적인 것이 아니며, 일부의 것도 아니다. 사회적인 텍스트다. 진실의 규명, 역사적 판단을 위한 사회적 공유재로서 모두가 공유하고 모두가 독해할 것이다. 다양한 각도에서 차이 나는 관점으로 끊임없이 읽어내는, 영원한 독서의 텍스트로 개봉되어야 한다. 박근혜-최순실-이재용 게이트, 국가-비선-자본의 커넥션으로 귀결된 대한민국 야만의 통치사를 더욱 섬뜩하게 폭로하기 위해서다. 현상을 지켜보기에 갑갑증을 느끼는 독자들은 당장 텍스트 읽기에 나서야 할 것이다.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주체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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