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규찬 칼럼]

웰컴 투 더 좀비 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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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좀비 나라로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이것은 어느 놀이시설에 내걸린 간판이 절대로 아니다. 공포를 즐기려는 아이들이 킬킬대며 들어가 악악 고함지르며 호들갑을 떨다 ‘별것 아니구먼!’ 으스대며 빠져나오는 그런 환상의 공간이 아니다. 사실, 놀이란 안전한 시설에서 가능한 활동이다. 만약 안전에 문제가 있다면, 우리는 유희의 시간을 쉽게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안전하게 즐기고 빠져나와도 여전히 안전한 인간의 세계가 가능할 때, 그때 좀비의 환상적 놀음은 가능하다.

우리가 말하는 좀비 랜드는 그런 환상적 안전 공간이 아니다. 실재하는 불안세계를 가리킨다. 공포의 실재계다. 죽을 것 같은 느낌 자체를 즐기는 안전한 유희 공간이 아닌, 실재로 죽음을 목도하고 주검을 체험하는 연옥세계인 셈이다. 멀쩡한 생명이 순식간에 주검으로 몰락하고, 살아있는 줄 알았던 게 불쑥 죽은 꼴로 뒤바뀐다. 시신이 불현듯 내 눈 앞에 도래하며,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그런 애매한 존재들이 주변을 배회한다. 그런 흉포하고 기괴한, 논리적으로 도무지 설명되지 없는 공포와 불안의 상황이 바로 실제의 좀비 랜드다.

대타자로서의 죽음이 일상의 삶에 갑자기 도래한다. 생명 현상의 시간에 예기치 않은 주검들이 기습적으로 현출한다. 말했듯, 멀쩡하게 살아있던 존재들이 주검으로 변신해 눈앞에 휘휘 날아다닐 것이다. 우리 바로 면전에서 툭 떨어지고 푹 꺾이며 헉 쓰러진다. 누구의 삶도 절대로 안전하지 않음을 충격적으로 환기시켜주는 시신들이다. 유감과 애도 혹은 슬픔은 좀비 랜드에서 애당초 불가능하다. 악악 비명의 소리, 컥컥 고통의 신음조차 낼 수 없는 압도적 상황, 공포의 풍경이 지배한다. 그런 지옥 같은 세계가 바로 좀비 랜드다.

그렇다. 2016년 대한민국을 우리는 좀비 랜드라 이름 붙이고 있다. 결코 과장의 수식, 오버의 레토릭이 아니다. 대구에서 발행되는 신문으로서 <조선일보> 다음 가라면 서러워 할 한강 이남의 최대 보수지 <매일신문>이 ‘좀비’라는 말을 쓴다. 신공항 문제를 무책임하게 제기하고 비겁하게 처리해버린 정권을 두고, “결정할 능력도 없는 좀비정부”라 비난했다. 존재하는 듯 존재하지 않고, 기능하는 척하면서 기능하지 않는 무능한 정권을 그렇게 규탄한다. 죽은 것에 다름없는 국가, 국가의 부재를 이렇게 조롱한다.

▲ 박근혜 대통령이 22일 민주평통 해외 자문위원과 만난 자리에서 김해 신공항 건설이 외국 전문기관의 결론을 정부가 수용한 것이라고 밝혔다. 사진 = 청와대
▲ 박근혜 대통령이 22일 민주평통 해외 자문위원과 만난 자리에서 김해 신공항 건설이 외국 전문기관의 결론을 정부가 수용한 것이라고 밝혔다. 사진 = 청와대

제대로 된 지적이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보자면, 정권의 좀비화, 좀비 국가의 출현은 근래의 현상이 결코 아니다. 세월호를 보라. 국가는 그때 어디에 있었던가? 어떤 생명구조의 활동을 제대로 펼칠 수 있었던가? 현장에 있는 듯 없었고, 대단한 일을 하는 듯 아무 것도 하지 않았으며, 결국은 아무도 구조하지 못한 정권 아닌가? 멀쩡히 살아 있는 생명들에게 가만히 있으라 죽은 화물을 대신해 고박 지시를 내린 국가가 아니었던가? 인구를 보호할 능력이 거세된, 생명을 구제할 의지가 박약한 좀비체제는 탄생한지 이미 오래다.

대량의 인구멸절, 일상화되고 체계화된 집단자멸이 그 결과다. 수많은 생명들이 순식간에 주검으로 변신한다. 세월호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뭍에서도 마찬가지다. 최근의 몇 가지 사례만 들어봐도, 다수의 교통대중이 오가는 장소에서 한 여성이 돌연 혐오범죄의 피해자로 전락하고 시신으로 발견된다. 묻지마 살인의 희생자가 된다. 지하철 역사에서 홀로 노동에 임하던 청년 노동자가 순식간에 들이닥친 차량에 목숨을 빼앗긴다. 주검이 된다.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성실한 10대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몬 사회적 참사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자살 소식도 연일 끊이지 않는다. 노인, 청년, 잉여, 쓰레기가 그렇게 처리된다. 거주지 없는 주거부정의 홈리스들이, 영원한 직업 없음의 신종부족 잡리스(Jobless)들이, 회생불가의 빈곤으로 내몰린 간난의 존재들이 그렇게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온갖 밑바닥 삶들이 우리 주변에서 사라지고 있다. OECD 34개 회원국 중 10년 내내 부동의 1위를 유지하고 있는 최고 자살률 국가 대한민국의 감출 수 없는 진면목이다. 이 자멸의 양상 또한 기능 중지된 국가 즉 좀비 국가가 유발한 참사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무력하고 무능하며 무책임한 좀비국가가 우리까지도 좀비 신세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최근의 또 다른 참혹한, 악몽 같은 좀비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보자. 공무원으로 일하던 어떤 사내가 퇴근하는 길이다. 가장을 맞이한 아내와 딸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그때 갑자기 지나던 아파트 옥상에서 뭔가가 떨어진다. 살아 있는, 산 듯 죽은 청년이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 삶을 포기하고 뛰어내린, 규정 모호한 존재다. 불과 몇 초도 되지 않아 형용 불가의 파경, 언어도단의 지옥도를 모녀가 목격한다.

▲ 네덜란드 화가 보우츠(Bouts, 1415~175)의 '지옥'
▲ 네덜란드 화가 보우츠(Bouts, 1415~175)의 '지옥'

아니다. 두 사람은 물론이고 그 현장을 실감나게 상상할 수 있는 우리 모두의 눈앞에 악몽이 펼쳐진다. 멀쩡하던 지상의 한 인간이 낙하하는 또 다른 인간과 충돌하여 주검으로 돌변하는 파국이다. 이렇게 대형사건을 일으킨, 이 인명사고를 전혀 예측치 못했을, 낙하하는 청년은 대체 무엇인가? 떨어지기 전 그는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는 좀비 상태이지 않았는가? 낙하하는 상태의 그를 우리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연이어 벌어진다. 무수한 존재들이 산 듯 죽은 듯 주변에서 쿵 떨어진다. 억 스러지며 푹 꺼진다.

트라우마의 고통이다. 신음과 비명이 난무하고, 괴음이 곡성(哭聲)과 마구 뒤섞여 쏟아진다. 좀비국가 하 이런 구조적 절망의 체제를 우리는 정확히 좀비사회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좀비가 좀비를 만들고, 좀비가 좀비를 쫒는 부활한 시체, 시신 부활의 시간. 좀비의 시간이 도래했다. 우리가 정책 결정의 능력을 상실한 좀비 국가에 대한 <매일신문>의 조롱과 비난에 동의하면서도 그에 머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좀비국가의 위험성과 비극성은 결코 중요 정책의 실패에만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생명보호능력을 상실한 좀비국가가 체계적 인간 멸살, 인구 자멸을 초래한다. 멀쩡한 삶들을 산 듯 죽은 듯 이상한 좀비로 전락시켜버린다. 인간이 일순간 시신으로 몰락하는, 생명해체양상이 좀비국가 하 우리가 겪게 되는 것이다. 이런 쉽게 도피할 수 없는 비극적 재난과 파국적 참사의 상황을 먼저 정확히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위험사회 혹은 재난체제라는 표현으로는 역부족인 좀비 랜드, 그 호러의 시간 속에 우리 모두 들어서 있다. 두려움이 따르겠지만, 냉정하게 주변을 인식하시라. 절대로 눈감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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