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따라 구름따라] 상주 천주교 신앙고백비(信仰告白碑)

죽음을 각오한 단호한 의사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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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과 곶감 그리고 누에고치가 유명한 상주를 삼백(三白)의 고장이라고 한다. 쌀은 백미라 하여 흰 것을 이르고, 곶감은 하얗게 분이 오른 것이 더욱 풍미가 좋다. 하얀 누에고치에서 실을 얻어 만든 명주는 옷을 말하는데 옷감으로 최상품으로 부귀와 풍요를 상징하였으며, 신분제 사회에는 돈이 있다고 하여 누구나 명주옷을 입을 수는 없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부사나 목사가 관할하던 곳으로 양반의 분포가 많은 곳이 상주였으니 자연 명주가 많이 생산되었다. 의식이 풍족하니 사람이 모이고, 마을과 대처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비록 조용한 소도시에 불과 하지만 경상도는 경주와 상주를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상주 장은 낙동강을 따라 부산에서부터 소금배가 오르내리고 충청도 물산과 경상도 물산이 모이는 곳으로 중요한 경제활동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였다.

지금 경북대학교 상주 캠퍼스를 지나서 남상주 IC를 가기 전 벚나무가 심어진 제방을 따라 우회전하여 가면 상주시 청리면 삼괴리에 이르는데 이곳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에도 보기 드문 개인이 만든 신앙고백비가 있다.

▲ 신앙고백비 해제
▲ 신앙고백비 해제

신앙의 자유가 있는 요즈음은 집집마다 대문이나 현관에 자신의 신앙에 따라 절과 카톨릭, 혹은 개신교를 나타내는 법륜과 십자가를 붙일 수 있어, “그게 뭐가 그렇게 대순가”하고 가볍게 넘길 수 있겠지만, 불교를 배척하고 숭유하던 조선시대에는 문제가 사뭇 다르다. 승려들도 사대문 안에 들어 올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존현과 조상숭배가 으뜸 덕목이던 유교를 국교로 하던 시기에 제사를 거부하는 카톨릭은 보수 유학자들과 지배층으로부터 국가 기강과 풍속을 어지럽힌다하여 박해가 극심하던 때였다. 병인박해를 전후로 하여 그 당시 천주교 신자가 2만 3천여 명에 이르렀으나, 8,000여명이 순교하였다. 대다수 종교가 들어오는 것은 선교사가 들어오거나 점령군과 같이 들어온 성직자들에 의하여 선교를 통하여 전래가 되는데 비하여 우리나라 카톨릭은 오히려 반대로 일부 양반 지식층들이 중국에서 들어온 마테오 리치 신부가 쓴 <천주실의>를 학문으로 접하고 신앙으로 받아들어 로마교황청에 신부를 청하여 전래되었다. 전래과정과는 다르게 박해의 역사는 피 비린내 나는 살육으로 이어진다. 그런 가운데 자신의 신앙을 당당하게 비로 나타낸다는 것은 어찌 보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다.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다른 형제들은 모두 박해의 서슬이 두려워 신앙을 버렸으나 김삼록은 끝까지 천주교를 믿어 하릴없는 도피 생활을 해야만 했다. 1866년 한불수호조약으로 다행히 목숨을 구하였으나, 지방에서는 사사로운 박해가 끊이지 않고 있던 1894~1900년 초에  김삼록 도미니코(1843~1935년)가 자기의 신앙 고백에 관한 내용을 그와 그 집안의 문중들이 살고 있던 석단산 아래 골짜기 쌍 바위 중 오른쪽 큰 바위에 자신의 믿음을 증거 하기 위하여 비석에 새겨 그의 집 뒷산 바위 위에 세운 것이다. 전체 모양은 십자가이지만, 날카롭지 않게 부드러운 갓 쓴 형태로 크기는 높이 127cm 폭 39cm 두께 22cm로 신앙고백비(信仰告白碑)를 건립한 것이다. 자연석 바위를 기단부(基壇部) 삼아, 마치 땅속에서 솟아오르는 모양으로  천주님과 교황, 주교, 신부, 교우를 위한 기도가 새겨져 있다. 비록 공식적 박해가 끝난 시점이라고 하더라도 8,000여명이 학살당하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곤장과 고문으로 피떡이 되었는데, 다시 또 박해가 온다면 하는 두려움이 없었을까?

그는 살아남은 안도감보다 박해에 죽어간 영령들에게 미안함과 숨어 도망 다닌 자신이 못내 부끄럽고, 당당하게 순교하지 못한 회한과 자책이 더욱 컷을 것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신앙을 당당하게 고백하고 이제는 다시 박해가 이루어지면 도망가지 않고 당당하게 맡겠다는 것을 나타낸 의지이다.

얼마 전 고인이 되신 신영복 선생님이 하신 말씀 가운데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하였다.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하기란 그 만큼 힘든 다는 말이다. 일제 강점기 한국기독교 목사들은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다는 교리를 어기고 거의 대다수가 신사참배를 하였다. 그런 때 조선독립을 외치며 명동을 개척하신 김약연 목사님은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 라는 말을 남기셨다. 앎이 왜곡되지 않고 실천으로 이어진 당당함이다. 이게 지식인들과 지도층이 보여줄 규범이다.

▲ 상주 천주교 신앙고백비 모습 마치 이땅에 신앙의 자유가 빨리오기를 염원하여, 땅속에서 솟아 오르듯 자연석 기단부에서 갓쓴 십자가 모양이다.
▲ 상주 천주교 신앙고백비 모습 마치 이땅에 신앙의 자유가 빨리오기를 염원하여, 땅속에서 솟아 오르듯 자연석 기단부에서 갓쓴 십자가 모양이다.

한반도 한쪽에서는 친박, 진박, 망박, 쪽박으로 선거철이 되니 박타령이 난무한다. 우습다. 정책과 비전은 어디가고 민은 안중에 없이 오로지 자기가 진정한 박 이라고 말하고 있다. 단언컨대 그 가운데 누구도 진박도 진민(眞民)은 없다. 무성한 박타령은 거의가 이익에 따라 움직이니 이는 당연히 사박(似而非)이다. 그렇게 친박, 진박 찾는 그들이 자신들이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대신 할 수 있을까? 회심곡에 한 구절처럼 저승길 대신 갈 친구는 고사하고, 길동무할 친구가 있는가? 다른 한쪽에는 계파니, 진정한 가신(家臣)이니 하는 말이 나온다. 소크라테스는 “정치가 타락하면 사회전체가 타락한다.”고 했다. 파리 떼가 꼬이는 것을 보니 정치판이 썩긴 썩은 모양이다.

성과상여금 문제로 공직사회가 술렁이고 있는 가운데 모든 공직자가 불안감과 부당함을 알고 있지만. 누구도 선 듯 나서려 하지 않는다. 누군가 나 대신 싸워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내일인데도 이렇게 몸을 사린다. 잘못 된 제도 인지는 알고 있지만, 노동조합이 막아주기를 바라고 , 정작 자신은 함께 투쟁은 고사하고 혹여 인사 상 불이익을 받을까 두려워 조합원 가입조차 조심스러워한다. 이런 자세가 공무원 사회 모습이다. 흔히들 공무원들을 말할 때 복지부동 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이게 이기적 복지부동이다.

신앙고백비는 자신과의 약속이자, 맹세이며, 결심이다. 외부에 공표하는 죽음을 각오한 의지를 나타낸 단호한 의사표현이다.이에 비하여 성과상여금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에 따른 거부 표지에 지나지 않는다. 공무원노조에서 보내준 성과 상여금 폐지 스티커를 보면서 새삼 상주 신앙고백비 앞에 머리를 숙이고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틀린 것을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공무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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